(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8)-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는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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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8)-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는 어떤 인물인가?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1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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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현천소학당(賢泉小學堂) 인문학 강의

 

【절문(切問)】

○ 제주 오현 중 유일한 제주 목사 출신인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재임 3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했는데, 곧바로 경남 사천으로 유배된 사연은?

○ 규암 송인수 선생이 피화(被禍)를 입어 후명(後命)을 받게 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의 실체는 무엇인가?

○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피화를 입어 후명을 받은 인물로 규암 송인수와 더불어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가 있는데, 그가 제주 목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음에도 제주 오현(五賢)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은?

○ 귤림서원에 배향된 제주 오현의 인물 중 충암(冲庵) 김정(金淨)에 이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동계(桐溪) 정온(鄭蘊) 두 선생이 한꺼번에 추향되어 제주 3현으로 불리다가, 뒤이어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뒤늦게 추향되어 제주 4현으로 불리게 된 사연은?

○ 충암묘(冲庵廟)와 장수당(藏修堂)을 계승한 제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명명(命名)하게 된 배경은?

○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훼철되자 위패(位牌) 대신에 5기의 조두석(俎豆石)을 새로 만들어 오현단에서 제사를 봉향하게 된 사연은?

○ 규암 송인수 선생의 대표적 유적지는?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는 어떤 인물인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선조 원년(1567) 10월 5일>조에 보면, ‘송인수에 대한 인물평’이 실려 전한다.

“송인수(宋麟壽)는 사람됨이 충후(忠厚)하고 성실하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상(喪)을 당했을 때는 자기의 감정대로 너무 슬퍼한 나머지 그가 엎드렸던 짚자리가 눈물로 인하여 썩었으며, 여막(廬幕)에 집을 지은 제비가 새끼를 까자 그 새끼들이 모두 흰 색깔이어서 사람들이 효감(孝感)의 소치라고 하였었다. 인종조(仁宗朝)에 조정에 있으면서 바른말[直言]을 잘하여 중명(重名)이 있어 사림(士林)이 그를 의지하고 믿었었다.

송인수가 경제(經濟)의 재주는 없었으나 마음을 비워 사람을 대하고, 또 치화(治化)에 예의 주력하여 사세를 따지지 않고 삼대(三代; 夏殷周)의 사업을 이루려고 하였으므로, 뭇 간인(姦人)들이 모두 질시하여 큰 화에 빠뜨렸다. 처음에 부박(浮薄)한 무리의 우두머리라 하여 관직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았다가 그 후 벽서(壁書) 사건 때 윤원형이, 택현(擇賢)의 말을 먼저 주창했다고 무고하여 결국 사사(賜死)하였다.”

한편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에는 귤림서원에 배향한 다섯 인물의 업적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 선생에 대해서는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규암(圭庵) 송(宋) 선생은 이름이 인수(麟壽)이고, 자가 미수(眉叟)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묘(己卯, 1519)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을사(乙巳, 1545)년에 사림(士林)의 영수가 되었는데, 허자(許磁) ‧ 이기(李芑)가 사화(士禍)를 일으켜, 마침내 정언각(鄭彦慤)의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며 끝내는 정미(丁未, 1547)년의 사화(士禍)를 면치 못하고 죽었다. 일찍이 이 고을에 목사로 왔었는데, 이곳 풍속을 크게 변화시켜 애민(愛民)의 흔적을 남겼다.”

이 비기(碑記)를 지어 묘정비를 세운 이는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으로서 부임한 지 2년째 되는 철종(哲憲) 원년(1850)에 오현단 경내에 세웠다.

<그림 (1)> 오현단 내에 세워진 <귤림서원묘정비>

 

한편 경남 사천(泗川)에 귀양을 가서 사는 동안 규암(圭庵) 문하에서 수학한 문인 구암(龜巖) 이정(李楨, 1512~1571)은, 스승인 규암 선생에 대한 찬문(贊文)의 글을 지어 그의 문집인 《구암집(龜巖集)》에 남겼다.

“선생은 타고난 기질이 맑고 밝으셨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도량이 순수하였다. 배우고 물으며 이치를 궁구(窮究)하기를 독실하게 실천했다. 의리에 대한 식별이 정미롭고, 인(仁)의 실천이 익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중종 때 간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사천현(泗川縣)으로 귀양 가서는 한 관리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는데 4년을 묵으면서 대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김안로가 벌을 받아 주살 당하자 조정으로 나아가 모든 신하들의 모범이 되었는데, 큰 재능을 펼쳐 보이기도 전에 이기(李芑) 등의 모함을 받아 결국 참혹한 재앙을 만났으니 애통하고도 애통한 일이었다!

 

稟姿和粹(품자화수) / 타고난 성품은 온화하고 순수하였고

精金美玉(정금미옥) / 시문은 정련된 쇠와 아름다운 옥과 같았네.

襟度脫灑(금도탈쇄) / 남을 감싸는 도량, 세속의 때 말끔함은

氷壺秋月(빙호추월) / 얼음 호로병의 가을 달같이 맑고 깨끗해.

篤志力學(독지역학) / 온 마음 다 쏟아 학문에 힘써 배우고

窮理居敬(궁리거경) / 사물의 이치 탐구하고 마음 경건하게 했네.

不倚不變 (불의불변) / 한쪽에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고 변함없이

順守其正(순수기정) / 올바른 것 따라 순리대로 지켜냈다오.”

 

<그림 (2)>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초상화(사천문화원 제공)

 

그런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그의 <신도비음기(神道碑陰記)>에서 그에 대한 품평(品評)과 함께 그가 화(禍)를 당한 근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규암) 선생은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순수하여 봄날 햇볕과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과 같았다. 그 지킴을 확고히 하고 행실을 결단 있게 하여 천심(千尋)의 절벽이 서 있고, 만길[萬仞]의 물이 앞에 있는 듯하였다.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시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위세를 떨치자 모든 대소 관료들이 다리를 후들대며 두려워하길 천수(天壽)를 누리다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지만, 선생은 곧 조정에서 목소리를 돋우어 말하기를, ‘반드시 윤원형(尹元衡) 형제를 먼저 벌준 후에 태제(太弟)를 책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로 화(禍)를 당한 근본이었다.”

 

<참고자료>

○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 속의 인물, 규암 송인수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족자형 그림 중에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란 게 있다. 조선 중종(中宗) 임금 시절인 1516년부터 1530년까지 한강변 두모포에 마련된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현직 관료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그린 작품이다.

사가독서란 젊고 유능한 문신을 선발해 휴가를 주어 공무 대신 학문에 전념하도록 했던 일종의 인재 양성책에서 나온 제도이다. 그리고 계회(契會)란 과거시험 합격 동기나 혹은 사가독서에 참여한 동기들 모임을 뜻하는데, 그림 아래쪽 좌목(座目)에 보면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이름이 보인다.

<그림 (3)> <독서당계회도> (소장처 –국립고궁박물관) * 보물 제2209호

 

<그림 (4)> <독서당계회도> ‘좌목(座目)’ (부분 확대)

 

여기 계회(契會)에 참석한 인물들이란, 나중에 조정에서 요직을 맡게 될 주요 인사들로서, 좌목에 적힌 참석자는 모두 12명으로 그 구체적 명단을 보면 이렇다.

장옥(張玉), 홍서주(洪叙疇),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송인수(宋麟壽), 송순(宋純), 주세붕(周世鵬), 이림(李霖), 허항(許沆), 신석간(申石澗), 엄흔(嚴昕), 최연(崔演) 등이다.

이들의 호(號), 이름, 자(字), 본관, 생년, 사가독서 연도, 사미시 입격 연도, 과거 급제 연도와 더불어 계회 참석 당시의 품계와 관직명, 부친이나 형제 등의 인적 사항 등이 해서체의 글씨로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독서당계회도’란 글씨는 맨 위에 전서체(篆書體)로 쓰여있고, 중간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한 계회(契會)의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가독서 하는 인물들이 독서당에서 공부만 한 게 아니라 그림 속의 정경처럼 자연을 벗 삼아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는 모습을 함께 담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현재 보물 2209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규암 송인수가 활약하던 당시 함께 교류 관계를 유지했던 사우(師友)들이란, 이처럼 독서당 동기 인사들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당시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명망가들을 총망라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예컨대 퇴계(退溪) 이황(李滉)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이 바로 그런 인물들로서 당시 이들의 사회적 지위나 사상적 비중은 실로 대단했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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