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대포동에 속하지만 회수동 사람들 사용..회수동(대포동) 동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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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대포동에 속하지만 회수동 사람들 사용..회수동(대포동) 동수물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1.1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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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름은 도래물이며, 도래는 제주어 도렷ᄒᆞ다에서 온 말로 둥글게 둘러 있는 뚜렷한 모양을 뜻한다.

회수동(대포동) 동수물

위치 : 대포동 2603번지(도로) 대포동 364번지의 서쪽
시대 : 조선
유형 : 수리시설(용천수)

대포동_동수물옆 물통
대포동_동수물

 

이 용천수는 번지상 대포동에 속하지만 회수동 사람들이 주로 사용했다. 회수동(廻水洞)의 옛 이름은 도래물이며, 도래는 제주어 도렷ᄒᆞ다에서 온 말로 둥글게 둘러 있는 뚜렷한 모양을 뜻한다. 큰 행사 때 메밀로 만든 둥근 떡을 나누어 주었던 제주향토음식인 돌래떡도 도래와 같은 개념이다.

동해방호소(1510∼1678년)가 들어오면서 한때 동해마을(東海村), 도래물을 동해물이라고도 하였다. 도래물을 한자로 회수(廻水) 또는 도문(道文)으로 표기하였다. 즉 이 마을에 도래물이라는 샘이 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며, 돌아서 흐르는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을의 하천인 회수천이 둥글게 마을을 휘감아 돌아 흐르는 건천이라 마을 이름을 회수라 불렀던 것으로 추측한다. 회수천은 동해내 혹은 도래물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도문리(道文里)라 했으나, 1910년에 회수리(廻水里)로 바뀌었다.

효종4년(1653)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고홍진(高弘進)의 도움을 받아 간행한 제주목·대정현·정의현 읍지인 《탐라지(耽羅志)》에서는 〈東海城 : 대정현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500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성안에 샘물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안에 있다는 샘물이 바로 동수물로 추정된다. 또 방호소條에서는 〈東海 : 성 안에 객사와 군기고가 있다. 정덕 경오년(1510)에 더래방호소(加來防護所)를 이곳으로 옮겼다. 차귀방호소에는 제주영에서 파견한 여수 1인이 있으나 동해에는 단지 대정 1인만 있다.〉라고 하였다. 동해방호소는 1678년 모슬진으로 옮겨졌다.

동수(東水)는 회수마을에서 볼 때 동쪽에서 물이 솟아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水)와 물을 더한 것은 물이 귀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귀한 물이라는 것을 강조한 취지다.

동수물은 군영의 생활용수로 이용하고, 논에도 관개하고 식수로도 사용한 회수동 사람들의 귀한 식수이면서 하원 섯동네와 대포상동 주민 일부까지 이용했다.

이 산물을 중심으로 동수동네가 형성되었는데 제주4․3으로 마을주민들은 회수와 대포로 이주하고 지금 옛 동수마을은 감귤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산물은 다른 이름으로 동이수, 동해물, 동시물, 동이소물, 영세미라고도 한다. 1968년에 高炳五·朴用厚가 펴낸 《원대정군지》에는 〈東廻水 : 중문면 대포리에 있는데 일명 靈泉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했다.

동수물은 두 군데에서 용출되는데, 동쪽에서 솟는 물은 수량이 많아 식수와 야채 등 음식물 세척용으로, 길 건너 서쪽의 물은 빨래와 목욕 등 다용도로 물통을 구분·정비(1932년)하여 이용되다가 1965년에 회수, 대포 두 마을의 상수도 수원으로 개발되어 이용되었다.

물의 수요가 커짐에 따라 1970년 지하수를 개발하여 수원으로 대체되면서 물은 방치되었다. 전면에 중산간서로가 개설되고 확장되면서 물터가 축소되어 사라질 위기에 있었으나 마을을 지킨 귀한 물이기에 회수마을회에서는 2009년에 중산간서로594번 도로 우측에 동수물이라고 표석을 세우고 새롭게 정비했다.

동수물 표석에는 “마을의 발원지이며 애환서린 삶의 현장이었으므로 미비하나 원형을 복원하여 영세 보전하고저 함이다”라고 적혀있다. 이 산물은 대포동에 속하나 관리는 회수동에서 하고 있다. 물통 속에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고, 2018년 5월 비가 많이 온 후에는 사각형 물통 위로 물이 넘치고 있었다.

서쪽에 있는 물은 일부 돌담과 산물이 솟는 구멍 등이 원형을 유지한다. 그러나 잡풀과 쓰레기들로 볼품없는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

한편, 제주의소리(180620 고병련 글)에 따르면 회수동에는 일뤠(7일) 동안 파서 물을 얻었다는 일뤳섬물(일러샘, 일렛샘, 일뢰샘)도 있었으나 농협창고가 들어서면서 메워져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작성 1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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