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9)-제주 목사 재임 3개월, 풍토병에 걸려 정사(呈辭)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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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9)-제주 목사 재임 3개월, 풍토병에 걸려 정사(呈辭)한 사연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1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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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2.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만에 풍토병에 걸려 정사(呈辭)한 사연과 묘수좌(猫首座)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

임진왜란 이전 조선 사회의 기류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뒤 중종(中宗) 만년에 접어들면서 권력 쟁탈에 혈안이 된 정국으로 말미암아 더욱 혼란스럽게 전개되기에 이른다. 그 혼란의 중심에 선 대표적 인물 가운데 김안로(金安老)가 있었다.

처음엔 그도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유배를 떠나기도 했었지만, 이후에 조정에 발탁되어 부제학에 이어 대사헌에 이르게 된다.

특히 그의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에게 장가들면서 중종 임금과의 부마(駙馬) 관계로 지위가 변했는데, 이에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위세와 더불어 권력 남용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반대파에 선 인물들을 가차 없이 탄핵하거나 좌천시켜 유배를 보내는 전횡(專橫)이 다반사였다.

이런 내용을 잘 아는 규암 송인수이었기에 그가 수찬(修撰)을 역임한 뒤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게 되레 역풍을 맞으면서 송인수는 제주 목사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그때가 바로 중종 29년(1534) 3월이었다.

제주 목사로의 부임 차, 바닷길로 떠나는 길목인 진도(珍島) 벽파정(碧波亭)에 이르렀을 때, 마침 그곳에 남아있는 충암(冲庵) 선생의 시 한 수를 마주하게 된다. 예전에 충암 선생이 제주로 떠나기에 앞서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지은 ‘평성(平聲) 우운(尤韻)’으로 된 시에 차운하여 규암도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짓게 된다.

주)呈辭(정사) : 벼슬아치가 벼슬을 사양하거나 말미를 청하는 따위의 원서(願書)를 관청에 제출함.

<그림 (5)> 진도 벽파정(碧波亭) 전경
<그림 (6)> 벽파정(碧波亭) 편액 –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글씨

 

 

○ 진도 벽파정의 김충암(金冲庵)의 시에 차운(次韻)하여

 

孤忠輕性命(고충경성명) / 외로운 충정, 생명도 가벼이 여겨

短棹任沈浮(단도임침부) / 짧은 노[棹] 하나에 일생의 부침 맡긴다네.

日落芳洲遠(일락방주원) / 해 저물고 꽃다운 물가는 저 멀리 있어

招魂意轉悠(초혼의전유) / <초혼>의 시작(詩作) 뜻, 무슨 소용 있으리오.

 

여기서 ‘방주(芳洲)’는 꽃다운 물가를 뜻하는 말인데,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 <구가(九歌) ‧ 상군(湘君)>에 등장한다.

곧, “‘향기로운 물가[芳洲]’에서 두약(杜若)을 캐어, 장차 저 하녀에게 전해 주련다.〔采芳洲兮杜若 將以遺兮下女〕”라고 했다. 이는 곧 동지(同志)를 몹시 그리워하는 뜻에서 쓴 말로 해석되곤 한다.

그리고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시인 송옥(宋玉)은 <초혼(招魂)>을 지어 그의 스승 굴원(屈原)의 신세를 애닯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림 (7)> 충암(冲庵)의 시에 차운해 지은 송인수의 오언절구

 

그런데 《충암선생집(冲庵先生集)》에 실린 충암의 원시는 이렇다.

 

○ 푸른 바다 건넘을 노래함[渡碧波口號]

 

宇宙從來遠(우주종래원) / 우주(宇宙)는 예로부터 심원한 것이고

孤生本自浮(고생본자부) / 인생이란 본래 덧없는 떠돌이 신세라.

扁舟從此去(편주종차거) / 일엽편주 타고 이곳을 떠나려 할 즈음

回首政悠悠(회수정유유) / 고개 돌려 바라보니 바로 아득하기만 하구나.

 

이 시가 실린 책의 ‘원주(原註)’에 보면, ‘벽파정(碧波亭)은 바다를 건너는 뜻이 담긴 정자의 이름이라 했고, 자신이 나포되어 제주로 떠날 시에 술에 취해 읊음[渡海亭名 拿來時泥醉號]’이라 소개했다.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기에 이르자 그의 동료인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제주 목사로 가는 미수(眉叟)를 전송하며>란 송별(送別)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서 대미(大尾)를 이렇게 장식한다.

“ … 경연의 자리에 반열을 나란히 해서 해와 달 같은 임금님을 우러르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자리를 같이하여 요순(堯舜)의 시대를 강론하면서 일찍이 고상한 이론을 듣고는 마음으로 진실로 따랐고, 다시 친교를 허락하여 품은 뜻을 서로 믿게 되었다오. 이별에 임해서 크게 탄식하지 않는 것은, 3년이란 세월이 또한 잠깐이기 때문이지요.”

한편 제주 목사로 부임해와서 제주 땅을 밟은 규암이 남긴 소회는 ‘제주에서 느끼는 감회[濟州有感]’란 그의 칠언율시에 잘 담겨있기도 하다.

 

“學得詩書三十年(학득시서삼십년) / 시서(詩書) 경전 배우길 30년 만에

竹符今領濟山川(죽부금령제산천) / 지방관 부절 차고 제주로 내려왔네.

一生憂患頭鬚白(일생우환두수백) / 평생의 우환에 머리 살쩍 하얗고

萬里飄零歲月遷(만리표령세월천) / 만 리 밖 떠돎, 세월 많이 흘렀구나.

毒霧瘴煙迷澤國(독무장연미태국) / 장독의 심한 기운 바다고을 헤매고

鯨波駭浪蹙彎天(경파해랑축만천) / 거친 파도 놀랍게 하늘로 솟구치네.

殊方日落離懷苦(수방일락리회고) / 이역 땅 저물녘에 이별 회포 괴로워

渭北江東眼欲穿(위북강동안욕천) / 위북, 강동 지역 뚫어지게 바라보네.”

 

<그림 (8)> 이백과 두보의 우정을 상상해 그린 그림(작자미상)

 

지방관이란 외직으로 부임해 지내봐야 고작 3년이란 짧은 기간이라고 애써 위로하던 친구 홍섬의 송별사나,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규암은 벗과 서로 헤어져 지내야 하는 아쉬움을 ‘제주유감(濟州有感)’이란 시어에 담아 토로하고 있다.

이는 마치 위수(渭水) 북쪽에 사는 두보(杜甫)가 강동(江東)에 머무는 이백(李白)을 생각하며, 서로의 처지를 나무[樹]와 구름[雲]에 빗대어 노래한 두보의 시, <봄날 이백을 생각함[春日憶李白]>이란 시를 읊조리는 듯하다.

그런데 제주 목사로 부임해온 지 3개월도 채 안 된 시점에 규암 송인수는 전주(全州) 감영에 들러 돌연 사직서를 제출하고서 고향으로 낙향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제주에 부임해오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제주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담긴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있는 실정(實情)이다.

다만 헌종 10년(1844) 송지수(宋志洙, 1793~1862)가 엮은 <규암선생 연보(年譜)>에 보면, “선생의 나이 37세 때인 중종 30년(1535)에 신병으로 체임(遞任)되어 돌아와 사천현(泗川縣)에 유배되었다.”라고 전하면서, 이에 부연해 설명하기를 “선생이 제주에 있을 때 모여드는 습하고 더운 기운 때문에 질병이 크게 일어 부득이 병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안로(金安老)의 무리들이 이것을 지적하여 죄를 만들어 꾸미고는 의금부 관원을 보내어 잡아 오게 하여 바로 사천현으로 유배 보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 29년 갑오(甲午, 1534)년’ 때의 기록을 보면, 규암이 병을 칭탁(稱託)하고서 정사(呈辭)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그에 대한 추고(推考)의 내용이 네 번이나 실려 전하고 있다.

곧 중종 29년 갑오(甲午, 1534)년 한 해에 일어난 일로서, (1) 6월 23일 ; 김안로가 임금께 아뢴 내용 - 병으로 정사한 송인수의 체직건, (2) 7월 4일 ; 전라 감사 남세웅(南世雄)의 서장 – 송인수의 추문 하달, (3) 7월 8일 ; 간원(諫院)의 계 – 송인수의 조옥(詔獄) 추고(推考) 건의 (4) 7월 19일 ; 송인수의 죄 경중(輕重) 율관에게 물음 – 감사(減死)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림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던 와중에 더불어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으니, 그해 7월 11일의 기록으로 “김안로(金安老)를 의정부 좌찬성 겸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제수(除授)했다.”는 내용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중종실록》 그해 7월 22일의 기록에 송인수에 대한 짤막한 내용의 기사와 더불어 실린 사신(史臣)의 논(論)이다.

곧, “송인수를 경상도 사천(泗川)에 유배시켰다.[流宋麟壽于慶尙道泗川]”는 단 한 줄의 기사가 실렸는데, 다음으로 ‘사신(史臣)은 논한다’의 글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사신은 논한다. 송인수가 채무택(蔡無擇)과 결탁하여 김안로(金安老)에게 붙었다가 그 뒤에 사당(邪黨)임을 깨닫고 배반했다. 김안로가 심히 그를 미워하여 제주 목사로 임명해 쫓아내어 송인수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고을을 버리고 올라왔다.

이 때문에 논죄했는데 해당된 율(律)보다 엄한 율로 다스리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마음 아파했다. 당초 김안로가 호오(好惡)의 뜻을 밖으로 내보이고 또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산(罷散)된 사람들을 서용(敍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는데, 이는 실제로는 그의 본마음은 아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사림(士林)들의 환심을 사려는 수작이었다. 송인수는 바로 이 술책에 넘어가 그에게 귀부(歸附)했던 것이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묘수좌(猫首座)의 설화를 지어내어 그를 풍자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과연 들어맞았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사신(史臣)의 기록이 바로 그 김안로(金安老)를 묘수좌(猫首座)로 빗대어 풍자한 이야기이다.

<그림 (10)> 묘수좌(猫首座)-조선시대 회화(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옛날에 늙은 고양이가 있었다. 발톱이나 어금니도 모두 못 쓰게 되어서 쥐를 잡아먹는 재주도 이미 다했다. 쥐 잡아먹을 계책이 서지 않자 귓속의 털 없는 부분을 뒤집어 내어 머리에 덮어쓰고 다니며 부르짖기를 ‘나는 이제 자비심을 발하여 삭발하고 중이 되었노라.

어떻게 부처님을 모시고 함께 정진하는 공부를 지어갈 수 없겠는가?’ 하였다. 쥐들은 그러나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머리를 깎은 것 같은 모양을 엿보고 나서 크게 그 말을 믿게 되어 나와서 응접하고는 늙은 고양이를 윗자리로 추대하여 묘수좌(猫首座)라 하였다.

수좌는 제일 상석에 자리 잡고 쥐들은 대소의 차례대로 서서 법석(法席)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빙 둘러 한 바퀴 돌 즈음에 어린 쥐의 행렬이 수좌의 입 앞에 당하고 앞의 행렬이 부처님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되면, 잽싸게 후려잡아 냉큼 삼켜 버리곤 하였다.

이렇게 해서 무리들이 날로 줄어들자 어떤 자는 수좌의 소행이라고 의심을 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철석같이 수좌를 믿는 자들은 성을 내기까지 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우겨대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수좌의 똥 속에 쥐의 터럭이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늙은 고양이의 술책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기에 덧붙여 이렇게 결론짓는다.

“물론 이 얘기의 작자는 사림(士林)을 쥐에 비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다만 그 뜻을 취해서 비꼬았던 것이니, 김안로를 고양이에 비유했다고 하는 데 대해서는 그 뜻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사실 옛날에도 ‘이고양이[李猫]’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로 꼽은 ‘이묘(李猫)’란 표현의 구체적 사례로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고려조 말엽 권세를 잡은 이인임(李仁任)을 두고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서 《고려사(高麗史)》 <최영전(崔瑩傳)>에 보인다.

“이인임이 충량(忠良)한 사람들을 무함하고 죄가 없는 사람을 살육하였기에, 그를 이묘(李猫)에 비유했다.”라고 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앞선 ‘이묘(李猫)’의 원조(元祖) 격으로, 중국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의 간신(奸臣)인 이의부(李義府)를 두고 이름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에 실린 내용을 보면, “이의부(李義府)는 용모가 온화하고 공손하여 남과 말할 때면 반드시 기뻐하고 미소를 지었으나 내심(內心)은 교활하고 음험하며 시기하고 이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의부를 일러 ‘웃음 속에 칼이 숨어 있다.[笑中有刀]’라고 하였으며, 또 온유하면서 남을 해친다고 하여 ‘이고양이[李猫]’라고 하였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결국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은, 당시 이조 판서였던 김안로(金安老)가 인사 추천권은 물론 온갖 권세를 누리는 전횡(專橫)으로 말미암아 제주 목사로 좌천(左遷)되기에 이르렀고, 목사 부임 3개월 만에 칭병(稱病)으로 정사(呈辭)했다는 사유 때문에 또다시 경남 사천으로 귀양을 떠나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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