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0)-대사헌이 된 규암(圭庵) 선생의 직간(直諫)과 후명(後命)을 받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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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0)-대사헌이 된 규암(圭庵) 선생의 직간(直諫)과 후명(後命)을 받게 된 사연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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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한 후 대사헌이 된 규암 송인수 선생의 직간(直諫)과 후명(後命)을 받게 된 사연

 

규암은 중종 32년(1537),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禮曹參議)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 동부승지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중종 38년(1543) 2월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관찰사로 재직하는 동안 남원부사 오겸(吳謙)과 남평현감 백인걸(白仁傑)의 선정을 치계해 한 자급씩 올려주도록 요청하는가 하면, 영광군에 순찰을 나가서 당시 83세로 치사(致仕)한 판중추(判中樞) 송흠(宋欽)을 위해 인근 13개 고을 수령과 함께 기영정(耆英亭)을 건립해주도록 조정에 주선하기도 했다.

한편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中宗) 39년(1544) 3월 22일’의 기사에 보면,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영광군에 순찰을 나가, 판중추 송흠을 위해 기영정(耆英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림 (11)> 기영정(耆英亭) - 전남 문화재자료 제99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산 520번지)

 

한편 《규암집(圭菴集)》에 보면, 규암의 시, <기영정(耆英亭)에 대해 지음[題耆英亭]>이란 원운시가 실려 있다.

 

湖海維靈有我侯(호해유령유아후) / 강호의 영령이 우리의 공후 있게 해

一生氷蘖苦淸修(일생빙얼고청수) / 일생을 음빙식얼(飮氷食蘖), 청빈함 닦았네.

主恩稠疊演褒賞(주은조첩연포상) / 주상의 성은(聖恩) 빈번해, 포상이 연달았고

孝意純深數乞州(효의순심수걸주) / 부모 돌봄 효심 깊어 지방관을 자청(自請)했네.

架揷二三千卷帙(갑삽이삼천권질) / 서가에 꽂힌 책만 무려 2, 3천 권 헤아리고,

年高八十六春秋(연고팔십륙춘추) / 연세 높아 올해로 86세 춘추라네.

耆英亭上成佳會(기영정상성가회) / 기영정(耆英亭) 시작(詩作) 모임 멋지게 이뤘나니

移入丹靑萬世留(이입단청만세류) / 단청으로 옮겨놓아 영원토록 머물리라.

 

‘평성(平聲) 우운(尤韻’인 원시에 차운하여, 기영정(耆英亭)의 주인인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또한 칠언율시의 시를 남겼고, 또 참판 김우급(金友伋)과 승지(承旨) 이희태(李喜泰)가 차운해 쓴 감상시가 연달아 시판(詩板)에 실려 기영정(耆英亭) 정자 내부에 걸려있다.

이 시판이 조성된 연대는 ‘숭정사(崇禎) 사(四) 정사(丁巳) 칠월(七月) 일(日)’로 표기되어 있어, 곧 철종(哲宗) 8년 정사(丁巳, 1857) 7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2)> 기영정(耆英亭) 실내에 걸린 시판 – 송흠(宋欽)의 차운시, 송인수(宋麟壽)의 원운시, 김우급(金友伋) ‧ 이희태(李喜泰)의 차운 감상시 순으로 실림

 

한편 광주(光州)를 대표하는 누정 중에 풍영정(諷詠亭)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언거(金彦琚,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광역시 문화재 제4호로 지정돼 있는데,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기동에 위치해 있다.

김언거는 홍문관교리를 거쳐 승문원 판교를 역임했는데, 그의 담박한 성정, 학문에 대한 열정, 풍류와 시문에 대한 감성을 이곳 풍영정 주변 풍경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시문을 남긴 이들의 면모를 보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퇴계(退溪) 이황(李滉), 남명(南溟) 조식(曺植) 등이고, 조선 제일 명필인 한석봉(韓錫琫)의 글씨로 ‘제일호산(第一湖山)’이란 편액이 걸려있기도 하다.

아울러 전라 관찰사 송인수(宋麟壽)가 남긴 ‘계진(季珍)의 정자에 씀[題季珍亭]’이란 시문 또한 현판으로 걸려있다. 여기 쓰인 활달한 초서체의 필적이 바로 규암의 친필(親筆)로 추정됨이 이채롭다. 계진(季珍)은 바로 풍영정(諷詠亭)의 주인인 김언거(金彦琚)의 자(字)이다.

 

○ 계진(季珍)의 정자에 씀[題季珍亭] - 규암(圭庵)

 

半日偸閑萬事休(반일투한만사휴) / 반나절의 한가로움, 만사를 제끼고

天涯春色迵添愁(천애춘색회첨수) / 하늘 끝 봄 빛깔, 수심 더하는 듯해.

山圍遠近桃花洞(산위원근도화동) / 산으로 빙 둘러싼 곳 도화동이라,

水散東西杜若洲(수산동서두약주) / 물은 동서로 갈려 두약주라네.

侍從久虛難浪跡(시종구허난랑적) / 관직의 일 오래 비워두고 떠돎은 어려우니

林泉雖美莫淹留(임천수미막엄류) / 숲 샘 비록 아름다워도 오래 머물 수 없네.

白頭如我歸田晩(백두여아귀전만) / 나처럼 늙어가는 이, 귀향은 더욱 더디어져

張翰孤舟不待秋 (장한고주부대추) / 농어 맛 그린 장한, 가을 옴 못 참았다지.

 

<그림 (13)> 풍영정(諷詠亭) 주인 김언거(金彦琚)를 위해 지은 규암(圭庵)의 친필로 된 시

 

전라감사(全羅監司) 직에서 물러난 송인수는 그 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성절부사(冬至聖節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대사헌이 되어 다시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였다.

인종 원년(1545)에 을사사회(乙巳士禍)가 일어나 송인수를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고 지목하여 탄핵하고 삭탈관직하자 부친과 형이 거주하던 청주로 내려가 은거하게 된다.

한편 이 당시 청주에 은거하며 지은 규암의 시조시 한 수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창랑(滄浪)에 낚시 넣고 조대(釣臺)에 앉았으니

낙조청강(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다.

유지(柳枝)에 옥린(玉鱗)을 꿰어 들고 행화촌(杏花村)에 가리라.”

 

이는 마치 그 시상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는 듯하다.

 

“푸른 물에 낚시를 드리우는 낚시터 둔덕에 앉아있자니,

해 질 무렵 맑은 강물 위로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가 참으로 시원스럽기만 하구나.

그만 일어나 버들가지에 낚은 고기를 꿰어 매고,

이 시원한 비를 맞으며 저 건너 살구꽃이 한창인 마을의 주점으로 돌아가 볼거나.”

 

참고로 이 시조의 종장에 나오는 행화촌(杏花村)이란, ‘살구꽃이 핀 마을’의 뜻인데 대개 술집을 상징화 한 말로 쓰인다.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란 시에 보면, “한번 물어보세, 술집이 어디 있는지를. 목동이 멀리 살구꽃이 핀 마을을 가리키네〔借問酒家何處在 牧童遙指杏花村〕.”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움도 잠시 잠깐일 뿐, 8개월 만에 인종이 승하(昇遐)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의 세상이 오자 그를 비판한 대가(代價)로 규암에게 찾아온 건 자진(自盡)하라는 임금의 후명(後命:사약을 받음)이었다.

<그림 (14)> 사약을 받아든 송인수(그림 박순철 화백)
(삽화제공 ; 《동아일보》 2001. 4. 18)

 

의금부도사가 송인수에게 사약을 가지고 오던 날은 마침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을 축하하려고 모여든 친척이나 제자들에겐 실로 충격적인 일로서 온 집안이 금세 울음바다로 변했지만, 선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죽음을 맞아들였다고 한다.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춘 송인수는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해서 큰 글씨로 “천지신명께서 내 마음을 드러내리라[皇天后土 可表此心].”라고 써서 처남인 권덕여(權德輿)에게 주었다.

종제(從弟)인 송기수(宋麒壽)에게 건네주라는 편지에는 “자식 하나를 그대에게 부탁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아들에겐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 주색을 경계하며[勤讀書戒酒色],

부모에게 살아서는 힘써 봉양하고 죽어서는 반드시 제례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養生喪死必盡情文],

구천에 떠도는 나의 넋을 위로토록 하라[以慰九泉之魂].”라고 하는 당부의 글을 남겼다.

 

《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2년 정미(丁未, 1547) 9월 19일’조에 보면 ‘전 참판 송인수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참판(參判) 송인수를 청주(淸州)에서 죽였다. 송인수의 자(字)는 미수(眉叟)이고 은진인(恩津人)이며, 청주의 마암(馬巖)에 우거(寓居)하였었다.

기질이 청명하고 덕성이 순수하며 독실히 배워 힘써 실천하였다. 중종 때에 간신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멀리 사천현(泗川縣)으로 귀양 가서 4년 동안 교거(僑居)하며 문밖을 나가지 아니하였다.

김안로가 처벌되고서 조정에 들어왔는데 미처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초기에 또 다시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에게 무함을 당하여 마침내 참화를 만나고 말았으니, 애통한 일이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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