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성안 최대 식수였던 ..이도1동 가락쿳물(용천수, 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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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성안 최대 식수였던 ..이도1동 가락쿳물(용천수, 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2.13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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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쿳물로 가던 옛 올레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도1동 가락쿳물(용천수, 멸실) 터

위치 ; 이도1동 1437-22번지
시대 : 미상
유형 : 수리시설(용천수)

이도1동_가락쿳물(1956년)

 

이도1동_가락천터

 

원래 제주성 안에는 식수인 용출수가 없었다. 조선 중종(1512년) 목사 김석철(金錫哲)이 성을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출 때 성안에 식수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가락쿳물을 성 안으로 넣기 위해 별도의 중성(重城)을 쌓았다고 한다.

김정이 쓴 충암집의 ‘제주풍토록’에서 “내가 사는 근처에서는 다행히 샘이 솟아 흐르고 있는데, 성남과원 동쪽 모퉁이에서 솟아나 큰물을 이루고 동성 밑으로 빠진다”고 하였다. 동쪽에서 솟아난 큰물은 ‘가락쿳물’로 동성 밑인 산지천의 지류인 가락천으로 흘러든다고도 하였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제주의 물 사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섬 안에는 모두 감천(甘泉)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정도 거리에서 떠다 마실 수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기고, 멀면 혹은 4, 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참고 마실 수 없으나 지방민은 익숙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인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오직 제주목의 가락천(嘉樂泉)은 성안에 있고 돌구멍에서 용출하기도 하고 혹 마르기도 한다. 명월소(明月所)에는 한 감천(甘泉)이 있는데 역시 심히 달지 않다.

그리고 제주의 동성 안에 산저천(山底泉)이 있는데 석조(石槽)의 길이가 3칸이고 너비가 1칸이다. 샘물의 맥이 탐라의 四面을 따라 용출하며 물맛이 극히 좋고 차갑다. 겨울에는 따뜻하여 탕(湯)과 같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얼음 같다.

성안 3000호가 모두 여기에서 떠다 마시며, 예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없어져 마를 때가 없으니, 실로 이는 서울 외에서는 드문 명천(名泉)이다. 토질(土疾)이 있어도 이 물을 마시면 곧 자연히 차도가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증보탐라지」에는 〈제주읍 이도리에 있는 물로 큰 바위 아래 굴이 있어 한줄기 천맥이 용출하니 깊이가 한길이나 된다. 겨울철에는 수량이 보통 작지만 여름 우기에는 찰찰 흘러 넘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성곽 읍성을 보면 성내에는 솟는 물이 없고 성 남쪽에 큰 돌 아래 큰 구멍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가락쿳물(嘉樂泉)이라 했으며, 깊이는 1장이었다. 흐름을 횡단하여 겹성을 쌓았는데, 성안 사람들이 길어다 마신다.〉고 기록하였다.

제주성의 최대 식수원은 가락쿳물이었다. 가락쿳물은 오현단 북동쪽 제주성 남문 안 냇가인 가락천의 용출수다. 이 물은 1970년대에 와서 상부지역(KAL호텔)에서의 지하수개발과 산물일대의 도시개발로 사라져 버렸다.

가락쿳물의 뜻은 명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 한자어로 가락천(嘉樂泉)이라 쓰기도 하는데, 아름답고 늘 즐거워함을 이르는 말로 詩經 嘉樂編의 喜樂君子에서 따온 말이다.

이 용출수는 제주성 남수문이 있었던 남수각이란 정자가 서 있는 절벽 밑에서 솟아난다고 해서 ‘남수각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안의 최대 식수였던 가락쿳물이 솟아 흘러내리던 터는 지금 도로가 되어버렸다. 가락쿳물로 가던 옛 올레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작성 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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