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재동 백송(白松)의 힘겨운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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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문의 야생초이야기] 재동 백송(白松)의 힘겨운 봄맞이
  • 박대문(우리꽃 자생지 탐사 사진가)
  • 승인 2024.02.2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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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600여 차례의 봄맞이를 되풀이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재동 백송(白松)의 힘겨운 봄맞이

 

백송(白松) (소나무과) 학명 Pinus bungeana Zucc. (재동 백송의 현재 모습)

 

봄기운이 곳곳에 번지고 있습니다. 움츠렸던 어깨도 펴지고 썰렁하기만 했던 가슴에도 뭔가 기다려지는 듯한 야릇한 기대감과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습니다.

하루하루는 별로 달라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계절의 변화 따라 느낌도 생각도 함께 변하는 것을 보면 사람 역시 자연 속에서 자연 따라 살아가는 종속 개체임을 느낍니다.

자연과는 다른, 별개의 개체 같아 보이고,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보이고, 자연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 봤자 자연의 한 구성체일 뿐 자연을 벗어난 별개의 존재물이 아니라는 것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실감합니다. 봄이 되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수가 지나고 이제 며칠 지나면 경칩이 됩니다. 되풀이되는 4계절이 항상 마찬가지인 것 같지만, 계절이 바뀌는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세월의 흐름 속에는 또 다른 자연의 오묘함이 배어 있습니다.

지난 봄과 오는 봄 사이에는 어느새 세월의 나이테가 하나 비집고 들어와 있습니다. 세월의 나이테는 성숙과 성장을 가져오지만 그 이면에는 쇠약과 쇠퇴도 함께 합니다.

얼마 전 서울 재동(齋洞)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8호인 재동 백송을 만나보았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백송의 수피를 보니 약간은 괴기스러운 감이 들 정도로 신비감이 있어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뿌리 밑바닥에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허허로운 공간을 채우며 하늘에 두 손가락을 펼치듯 내 뻗친 V자 형태의 두 몸통 줄기가 별나 보이기만 했습니다.

몸통에서 뻗쳐나온 가지는 일반 나무의 나뭇가지처럼 옆으로 쭉쭉 뻗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용틀임하듯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있는 별스러운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기를 한참, 두 몸통 줄기의 신비로움에서 잠시 벗어나 위아래를 훑어보니 군데군데 쇠 받침목이 어지러울 정도로 거대한 백송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몇 가닥 굵은 쇠줄이 백송 가지를 옭아매 수형(樹形)을 잡아주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온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기가 넘쳐나게 한다는 봄맞이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맞이하다 보니 이제는 쇠약해져 홀로 서 있고 지탱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희귀하고 신비감 도는 매력이 있어 귀한 선비 집 정원이나 양지바른 자리에서 자라던 백송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항시 푸르고 청청할 수가 없나 봅니다. 독야청청 굳센 것으로만 알려진 소나무마저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봅니다. 차제에 자그마치 수령 600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8호인 재동 백송의 내력을 살펴봅니다.

마치 용틀임하듯 뒤얽힌 백송의 나뭇가지.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

 

백송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 원산지이며 최대 15~25미터까지 자란다는 식물도감의 설명입니다. 자라는 속도가 매우 더디며 지름은 1.7미터까지 자라고 나무 전체의 모형인 수관(樹冠)이 둥글게 발달합니다.

국내에 들어온 시기는 대략 600년 전,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 등에 의해 처음 심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 자란 백송은 눈에 띌 정도로 수피가 다른 빛깔을 띠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희귀하며 생장이 느리고 옮겨심기가 어려워 한국에서는 예전부터 소중히 여겨온 소나무입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크게 자란 백송 개체는 대부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현재 재동 백송을 비롯하여 조계사, 고양 송포 등 5그루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중 천연기념물 제8호인 서울 재동 백송은 헌법재판소 측면 뒤쪽 구내에 있습니다. 한 그루가 뿌리 근처에서 둘로 갈라져 V자형으로 자라 마치 두 그루인 것처럼 보입니다.

나무 높이는 약 17미터, 밑 부분의 줄기 둘레가 3.8 미터 정도, 수령은 대략 600년으로 추정된다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4호이었던 서울 통의동의 백송이 1990년 태풍에 쓰러져 고사한 뒤 현재는 국내 백송 중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재동 백송 주변 터는 예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 교정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구한말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의 집터이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멀리 중국에서 건너와 낯선 땅에서 꽃 피고 지는 600여 봄을 맞이하고 보낸 재동 백송, 한때는 봄이면 더욱더 크고 생장하여 주변에 도드라지게 하얀 수피를 뽐내며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곳곳에 쇠 받침대가 얼기설기 떠받치고 쇠밧줄로 나뭇가지 수형이 겨우 유지되는 노쇠한 모습으로 봄을 맞아 힘겨운 한 해의 시작을 하는 모습이 애잔해 보이기조차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600여 차례의 봄맞이를 되풀이하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새봄을 맞아 쇠잔한 몸체가 더욱더 강건해질 리는 만무하고 혹시 상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될 지경입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모든 생명체는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나 봅니다.

새로이 맞이하는 갑진년의 봄맞이, 어둡고 차가운 겨울을 이겨내고 신비롭게 돋아나는 새 싹과 쪼매한 풀꽃을 보며 노쇠한 백송의 봄맞이를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올해 만날 고운 산들꽃에 가슴이 설레는 나 자신을 보며 가슴 한구석에 엉키는, 해마다 되풀이되던 봄맞이가 올해도 예전처럼 생기 넘치며 활기찬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수령 600년 백송의 봄맞이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시, 오는 봄 가는 세월의 야속함을 느낍니다. 그래도 지루한 겨울 끝에 다시금 찾아오는 새 봄맞이, 쪼매한 풀꽃 앞에서 가슴 떨리는 그 순간의 기쁨이 마냥 기다려지기만 하니 천생 어찌할 수 없는 꽃쟁이 팔자인가 봅니다.

(2024. 2월 서울 재동 백송을 생각하며)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필자소개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 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꽃사랑, 혼이 흔들리는 만남』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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