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항일민족의식 마을 소년들에 고취..협재리 홍경옥(洪卿玉) 지사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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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항일민족의식 마을 소년들에 고취..협재리 홍경옥(洪卿玉) 지사 생가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4 0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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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93년 4월 13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협재리 홍경옥(洪卿玉) 지사 생가 터 

위치 : 한림읍 협재리 1902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홍경옥(항일투쟁)

 

협재리_홍경옥지사생가터

 

홍경옥(1912∼1949) 지사는 남양홍씨 榮鍾의 장남이다. 초등학교 재학시 협재소년회에 가입, 월간지《어린이》를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길렀다. 동회의 부단장으로 선임되자 항일민족의식을 마을 소년들에게 고취시켰다. 약 1년간 부산상업실천학교에 다녔다.

1929년 3월 용수리 개량서당 교사로 연말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 동향 尹漢珍의 지도로 張炳允, 姜公洽, 高昌淳, 張禎鎬, 金二奎, 金昇玉 등과 회합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변혁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면 일제는 패망한다고 믿어 독서회를 조직, 동년 3월 하순 홍경옥, 장병윤 등은 윤한진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흑막》《노동계급의 경제학》등을 읽고 토론으로 이어졌다. 독서회의 지도자는 홍경옥이었다.

1931년 5월 5일 일어난 한림공립보통학교 동맹휴업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받아 李益雨, 崔福烈, 尹漢珍 등 4명과 함께 구속당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농업공항과 더불어 농촌의 피폐가 극에 달하여 농조운동이 활발하였다. 제주의 합법적인 농조운동은 어용노조로 변질되어 일제의 침략을 돕는 도구로 전락했다. 따라서 과거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혁명적 농조운동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졌다.

이를 주도한 활동가는 金斗璟과 全協系列의 康彭鶴 등이었다. 김두경은 제주도적농준비위원회를 정하여 夫秉勳을 책임자로 지명했다.

1933년 1월 경 제주도혁명적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한림면의 농민위원회는 조직을 강화하는 데 주력, 金京奉, 梁秉時 등이 이를 주도하였다. 협재리의 운동을 이끌고 있던 홍경옥은 1934년 2월 김경봉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하고 동월 하순 장병윤, 강공흡 등과 회합하여 동지규합에 힘썼다.

협재리의 운동가들은 동년 7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홍경옥을 책임자로 하고 농민부에 홍경옥, 재정부에 장용진, 가두부에 장병윤, 소년부에 강공흡을 각각 담당자로 정하였다.

1934년 7월 경 제주도청 산림주사보 곽지 출신 朴致龍 및 한림면 주재 농회지도원 蔡如玉이 협재리에 출장나와 砂防林 설치 예정지의 토지 소유자에 대하여 양해사항에 날인하게 하자 홍경옥은 토지소유자 7∼8명에게 이의 부당성을 성토하면서 항일의식을 북돋우었다.

이 무렵 적색노농연구회, 신좌면 농업조합 준비위원회로 조직이 확대되었다. 이는 혁명적 농조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홍경옥은 김경봉이 지도하는 제주도혁명적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 활동에 앞장서다가 일경에 체포당하였다. 이 일로 62명이 구속되었으며 이 사건을 적색농업조합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16명이 목포로 이송되어 1937년 4월 12일에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홍경옥은 징역2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강공흡, 장병윤, 장용진 등은 징역1년6개월형을 받았다.

1943년 4월 경북 영일군 구룡포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살다가 1949년 11월 15일 구룡포리에서 병사하였다. 정부는 1993년 4월 13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지사의 생가 터에는 집이 없고 농사를 짓고 있다.
《작성 19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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