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3)-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弘化閣)'(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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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3)-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弘化閣)'(1437)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3.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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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최근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에 대해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이후 다시 '현행복의 인문학이야기'를 주제로 새로운 연재를 계속한다. 한시로 읽는 제주 역사는 고려-조선시대 한시 중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제주관련 한시들을 모아 해석한 내용이다. 특히 각주내용을 따로 수록, 한시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편집자주)

 

 

“한시(漢詩)로 읽는 제주 역사”(3)

엮어 옮김[編譯] ‧ 마명(馬鳴) 현 행 복(玄行福)

 

3.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弘化閣)>(1437)

 

【원문(原文)】

<그림 (1)> 영곡 고득종의 <홍화각기(弘化閣記)> 중 부분 확대

 

【판독(判讀)】

 

詩曰

漢拏山峻駕鼇頭 鼓角五更無事曉

山下城居作巨州 謳歌十里大平秋

甘棠惠化醫民瘼 傑閣翬飛宏制度

細柳威風破賊愁 後人應說益陽侯

正統二年丁巳 孟春旣望

鄕人 前禮曹參議 高得宗記

 

【해석(解釋)】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弘化閣)> 시(詩)에 이르길,

 

漢拏山峻駕鼇頭(한라산준가오두) 한라산의 험준함, 자라 머리에 올라타서이라,

山下城居作巨州(산하성거작거주) 산 아래로 성이 들어서서 큰 고을 이뤘네.

鼓角五更無事曉(고각오경무사효) 오경에 울리는 고각 소리, 새벽이 무사하고

謳歌十里大平秋(구가십리대평추) 태평의 가을을 칭송함, 십 리 안에 자자하네.

甘棠惠化醫民瘼(감당혜화의민막) 감당의 은혜로운 덕화, 백성들 민폐 다스리고

細柳威風破賊愁(세류위풍파부수) 세류영의 엄한 군율, 적의 두려움 깨뜨리네.

傑閣翬飛宏制度(걸각휘비굉제도) 날아갈 듯한 큰 누각, 굉장한 규모이려니

後人應說益陽侯(후인응설익양후) 후인들 입에 응당 익양후 치적 오르내리리.

※ 운자 : 평성(平聲) ‘尤(우)’운 - 頭, 州, 秋, 愁, 侯

정통(正統) 2년 정사(丁巳, 1437)년 1월 16일에,

고향 사람 전 예조참의(禮曹參議) 고득종(高得宗)이 기문을 쓰다.

 

<그림 (2)> 삼신산을 등에 진 자라의 상상화(*출처 - 《고금도서집성》)

 

 

【해설(解說)】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이 지은 이 시의 출처는 그가 지은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실려 있다. 이 기문은 목판에 새겨져 있는데, 현재 삼성혈 내의 고양부삼성사재단(高梁夫三姓祠財團)에 소장되어 있다.

그 글에서 영곡은 ‘한라산’의 한자어 표기를 ‘漢拏山’이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그 배경이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높은 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어 특히 주목을 끈다.

참고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제주목(濟州牧)> ‘산천(山川)’조에 보면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 * 곧 銀河)을 나인(拏引, * 곧 끌어당김)할만 하기 때문이다[漢拏者以雲漢可拏引也].”라고 밝히면서도 정작 ‘궁실(宮室)’조에 실린 고득종의 <홍화각기>에는 서문 격의 글인 앞부분과 마지막 시편이 생략된 채 실려 소개되고 있다.

조선 각 도의 지리, 풍속, 인물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우리나라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출간된 건 성종 12년(1481)이다. 그런데 고득종이 <홍화각기(弘化閣記)>를 써서 목판에 새겨놓은 게 세종 19년(1437)이기에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보다는 실제로 44년이나 앞선다.

따라서 한라산(漢拏山)이란 작명(作名)의 배경으로 특히 ‘은하수를 끌어당길 만함[雲漢可拏]’이란 표현을 단 문헌으로는 단연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가 가장 앞선 기록으로 자리한다.

<그림 (3)>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그려진 한라산의 모습(‘건포배은(巾浦拜恩)’ 부분도)

 

이렇듯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기에 <홍화각기> 전문을 참고로 소개한다.

 

<참고자료> ○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

【원문(原文)】(全)

<그림 (4)> 고득종의 <홍화각기>(全) *소장처 : 고양부삼성사재단(高梁夫三姓祠財團)
(사진 제공 : 이창훈)

 

【원문(原文)】 (1)

<그림 (5)> <홍화각기(弘化閣記)> 부분 확대(1)

 

【판독(判讀)】(1)

弘化閣記

州邈居南海之中 維嶽嵩高 峻極于天 號曰漢

拏 以其雲漢可拏也 別號圓山 以其穹窿而圓也

州名曰濟州 至丙申歲 歧而三之 東曰旌義 西曰大

靜 以分其治焉 其在昔時 或稱東瀛洲 或稱乇羅

或稱耽羅 随代而改 載在史策可見矣 厥初無人 神

子三人 從地湧出 至新羅時 始自歸附 歲修職貢 垂

千百年于玆矣 及我

本朝 益被

聖主 文明之化 懷柔之德 風移俗易 民安土着久矣 歲在癸

丑 自其年秋 至翌年夏 不雨而旱 山川滌滌 百物凋

耗 人飢馬斃 不知其幾矣

宸心軫慮 命廷臣若曰 濟州之地 為我附庸 良馬之出 異貢之産 國

有頼焉 而其地瘠其民貧 海寇絡繹 草賊竊發 控

禦為難 予素難其守矣 近因旱暵 連歲凶歉 民多

飢饉 予甚恤焉 况隔海外 尤遠於堂下 民之休戚 政之

得失 豈予耳目之所能及知乎 宜於兩府之賢 文武才

略威惠並著者 愼簡以聞 於是 舉前工曹參判 益陽

崔公海山以聞

 

【해석(解釋)】(1)

<홍화각기(弘化閣記)>

(제주란) 고을은 멀리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유독 산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있어 존엄하고 고귀하여 한라(漢拏)라고 불리는데, 그게 은하수[雲漢]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특별히 둥근 산[圓山]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건 중앙은 높고 주위는 차츰 낮아져서 하늘이 둥글둥글하게 보여서이다. 고을 이름이 제주(濟州)라고 불려왔는데, 병신(丙申, 1416)의 해에 이르러 셋으로 갈라지면서 동쪽은 정의(旌義)고을, 서쪽은 대정(大靜)고을로 나뉘어 다스리게 되었다.

옛적에 (제주는) 동영주(東瀛洲)라고 불렸거나, 혹은 탁라(乇羅)로, 혹은 탐라(耽羅)로 불려왔는데, 시대에 따라서 고쳐 불렀음은 사책(史策)으로 전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이 없었으나 신(神)의 아들 세 사람이 땅에서 솟아났다. 신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스스로 찾아가 복종하게 되었는데, 해마다 조공의 직무를 수행해온 지가 수백 년이 드리워져 오늘에 이른다.

우린 본조(本朝, *곧 朝鮮)에 들어와서는 성(聖)스런 임금께서 펼친 문명의 교화(敎化)와 회유(懷柔)의 덕에 힘입어 풍속이 바뀌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대대로 그 땅에 살아온 지 오래다.

계축(癸丑, 1433)의 해에,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들어 산천초목이 바싹 타들고 온갖 작물이 쇠하여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말이 폐사(斃死)함은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성상(聖上)께서 마음이 몹시 아리고 걱정스러워 조정의 대신들에게 명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주란 땅은 우리에게 부용(附庸) 해온 지역으로, 양마(良馬)가 나오고 특이한 공물(貢物)이 산출되어 나라에 혜택을 주어 왔다. 그러나 땅은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바다로 왜구의 왕래가 끊이지 않고 좀도둑이 몰래 일어나도 이를 방어하기가 어렵기에 짐(朕)이 평소에 이를 지켜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던 곳이다.

요즘에 와선 날씨가 몹시 가물고 무더워서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들고, 백성들 대다수가 기근(飢饉)으로 허덕이니 짐이 몹시도 근심되고 걱정이 된다. 하물며 바다로 막힌 바깥 지역이기에 궁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백성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함이나 정치의 얻음과 잃음의 잘잘못을 어찌 나의 눈과 귀로 깨달아 알 수 있단 말인가. 의당(宜當) 양부(兩府, *곧 의정부와 중추부)의 어진 관료 중에서 문무(文武)의 재략과 위엄을 두루 갖춘 빼어난 인물을 신중하게 간택해서 알리라.”

이에 전 공조참판(工曹參判) 익양(益陽) 최해산(崔海山) 공을 천거(薦擧)해 주문(奏聞)하였다.

<그림 (6)> 고득종 서체의 홍화각(弘化閣) 현판과 기문 목판 (*소장처 : 고양부삼성사재단)

 

【원문(原文)】(2)

<그림 (7)> <홍화각기(弘化閣記)> 부분 확대(2)

 

【판독(判讀)】(2)

 

上心載悅 以為允當 卽於甲寅秋八月初七日

命下為都安撫使兼判牧事 公開

命之日詣

闕以謝 畧無憚色 卜日以行 及下舟之初 先以救荒之政

汲汲於心 哀矜惻怛 煦濡撫摩 以賑民生 使呻吟者

變為謳歌 餓莩者 登於仁壽 審理寃抑獄不滯訟

宣揚敎化 民知禮義 以至牧馬之術 禦寇之備 興學

勸農 救灾恤患 治人之道 算無餘策 而且事神以

誠 齋心滌慮 凡有祈祭 盡心明享 以致神格 及明

年風雨時 若禾乃登場 民樂鼓腹 馬大蕃息 我

殿下 簡賢之恩 深且至矣 公以事輯人和 欲修葺館宇

之頹圮 而重其事 未暇為也 適營失火 歎無所居 只

役髡頂者 及入番之輩 乃取破寺材瓦 先起燕寢之

室 琴堂浴房庖廚廊舍 厥位乃備 小西而竪宇三

楹 以為便政之堂 左右各有廊 以為分房 案牘之所

又其西建閣三楹 補以重簷 其䂓宏而密 其制壯而

麗 處之巍巍 望之翼翼 塗墍丹雘 奐輪可覩 其南置

半刺賛政之堂 其北置

獻馬立養之廐 東置營庫 西置燠室以藏

進膳之物 又其南外 別構樓 門下通出入 上懸鍾鼓以設

更漏之備 東藥庫 西纛所 東西對峙 皆繚以垣墻 旣

礱且堅 凡為屋計共二百有六間 而每屋別起 不相接

連 所以備火灾也 其經營位置 制作得意 皆出於公之

指畫矣 公一日出坐閣上 召集鄕中父老 以落其成 且

圖所以名之也 或有言曰 濟為州北枕巨海 浩浩蕩蕩

一目千里 南對崇岳 鬱鬱䓗䓗 四時一色 冬無苦寒 夏

多凉風 家家橘柚 處處驊騮 風雲之状 月露之形 朝暮

變化 千萬其態 而承

 

【해석(解釋)】(2)

성상께서 마음이 흡족해 기뻐하시면서 윤허를 내림이 마땅하다고 여기셨다. 곧바로 갑인(甲寅, 1434)년 가을 8월 7일에 도안무사겸판목사(都安撫使兼判牧事)로 명(命)을 내리셨다.

공(公)이 명을 받아든 날, 입궐하고선 감사해하며 두려워하는 기색과 표정을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좋은 날로 점을 치고선 (제주로) 곧바로 떠났다.

배에서 내리고선 맨 먼저 기근이 들어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내세우며, 쓰라린 마음으로 동정하고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풀고 어루만져주면서 백성을 구휼(救恤)함에 힘을 쏟았다.

고통으로 신음하던 이들에게 그 처지가 변해 칭송의 노래가 불려지도록 했고, 굶주려 죽는 자들에게 인덕이 생겨 장수하도록 만들었다. 원통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사는 자들에게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며 소송이 지체되지 않도록 조처했다.

교육하고 감화시킴을 널리 드날리게 하니 백성들이 예의(禮義)를 알아채게 되었다. 심지어 말을 기르는 기술이나 왜구에 대비한 방어책을 익힐 수 있도록 배움을 일으키거나 농사를 권장하는 기술은 물론 재난과 우환을 구휼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남김없이 여러 대책을 계산하고 강구했다.

또한 신을 모시는 일에도 정성과 정결한 마음으로 걱정을 씻어내리니 무릇 (기우제(祈雨祭)나 기청제(祈晴祭)처럼) 기원을 비는 제사가 행해질 때면, 마음을 다해 밝게 흠향토록 하며 신격(神格)에게 치성을 드리곤 했다.

이듬해에는 비와 바람이 때맞춰 내리고 불어주니 곡식이 마침내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마침내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즐거워하고, 키우는 말들은 크게 붇고 늘어났다.

우리 전하께서 어진 선비를 간택한 은혜가 깊고도 지극했다. 공은 인화(人和)를 이루는 일에 주력하였기에, 허물어진 관사 가옥을 수리해 고치고 싶어도 그런 일을 비중 있게 여길 짬이 없었다. 그때 마침 영내(營內)가 실화(失火)로 말미암아 (소실되었기에) 머물 장소가 마뜩찮음을 못내 한탄하게 되었다.

다만 중[髡頂者]들에게 시키고 입번(入番)한 무리들에게까지 그 역할을 맡겨 마침내 폐사된 절의 재목과 기와들을 가져다가 먼저 편히 쉴 방을 만들었다. 이어서 금당(琴堂, * 목사가 집무를 보는 청사) ‧ 욕실 ‧ 주방(廚房) ‧ 측실(側室) 등이 제자리를 구비하게 되었다.

조금 서쪽에 세 칸짜리 집을 세워 정사를 보는 집으로 삼았는데, 좌우로 제각기 복도가 들어서 있고, 나뉜 방은 관부의 공문서를 취급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그 서쪽에 세 칸짜리 누각을 세웠는데, 이중의 처마로 보완했다.

그 규모는 크고 조밀하며, 그 법식이 장중하면서도 화려하다. 자세히 살펴볼수록 높고 큰 모양새를 이루고 있고, 바라다볼수록 장엄하고 웅장해 보인다. 지붕이나 담장은 진흙을 발라 선명한 붉은 빛이 드러남이 찬란하여 볼만 하다.

그 남쪽으로는 판관(判官)이 집무를 보는 청사가 들어서 있고, 그 북쪽에는 헌마(獻馬)를 기르는 마굿간이 있으며, 그 동쪽에는 영고(營庫)를 두었고, 그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진상할 물품들을 보관하였다.

또 그 남쪽 밖으로 별도의 누각을 지었는데, 그 문 아래로는 출입을 하도록 하고 그 위에는 종과 북을 걸어두어 경점(更點)을 알리는 물시계 설비를 하였다. 동쪽의 약(藥) 창고와 서쪽의 깃발 저장 창고는 동서로 서로 마주 보게끔 자리 잡았다. 모두 담장으로 에워쌌는데, 이미 다듬어진 돌들로써 견고하였다.

무릇 집으로 지은 게 모두 공히 이백여섯 칸이나 되는데, 매번 집마다 별도로 떼어놓아 연접(連接)하지 않도록 지은 것은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까닭에서다.

그 위치를 설정하는 등의 일을 입안(立案)해 추진함이나, 뜻한 대로 제작함이건 모두 공의 손을 거친 지시와 계획에서 나왔다.

공이 어느 날 하루는 누각 위에 앉았다가 고을 안의 부로(父老)들을 초청해서 모이도록 해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하면서 누각의 이름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을 했다.

“제주가 고을이 되면서, 북쪽으로는 큰 바다를 베개 삼으니 호호탕탕(浩浩蕩蕩)하며 수세(水勢)가 웅장해 천 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높은 산을 마주하게 되니 울울총총(鬱鬱葱葱)하며 초목이 푸르고 울창하여 사철이 한가지 색깔일 겁니다.

겨울에는 심한 추위가 없고,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어, 집집마다 귤(橘)과 유자(柚子)요, 곳곳마다 화류(驊騮)란 명마(名馬) 한 종류라. 바람과 구름의 상태, 달밤의 이슬의 형태가 아침저녁으로 변화하니 그 형상(形狀)이 천만 가지 모양으로 달리 나타나게 됩니다.

<그림 (8)> 제주목관아 망경루에서 본 한라산 (*소치(小癡) 허련(許鍊) 작 – 일본인 개인소장)

 

【원문(原文)】(3)

<그림 (9)> 홍화각기(弘化閣記) 부분 확대(3)

 

【판독(判讀)】(3)

命于玆者 登於斯 休於斯 山翠濤聲 常分於几案之上

奇卉異草 悉萃乎 顧眄之間 古有樓而名 萬景者此也

幸今有閣 宜復萬景之名 公曰 不然 予之建閣 非為

翫景也 非為遊觀也 昔文王之時 周公治於內 召公治

於外 化之及人 如風之動 漸之被之曁之 而當世之人

莫不鼓舞於德化 變易其氣質 豈非二公贊襄弘

化之治歟 方今

聖明在上 元臣碩輔 同寅協恭 急於求賢 分遣外治 然

猶惠澤未窮 治化未洽者委任 或非其人奉行未盡

其理也 凡分

憂者 日登此閣 無佚遊 無縱欲 思盡委任之責 常以弘

王化達民情為心 則周之治 可復見於今日 而濟之民 當

受福於無窮矣 然則盖以弘化 名此閣乎 於是聞者

咸拜而謝曰 公之命名 能使後之継継者 益有所勉

而吾民之永被

仁化者 益可保矣 遂退而請予 書弘化閣三字 以揭之

且請為記 以垂後來 予鄕人也 義不可辭 故不揆鄙

拙而為之記

詩曰

漢拏山峻駕鼇頭 鼓角五更無事曉

山下城居作巨州 謳歌十里大平秋

甘棠惠化醫民瘼 傑閣翬飛宏制度

細柳威風破賊愁 後人應說益陽侯

正統二年丁巳 孟春旣望

鄕人 前禮曹參議 高得宗記

 

【해석(解釋)】(3)

임금님의 명(命)을 받들고 이곳에 내려온 분께서 여기에 오르고 여기에서 쉬게 되면, 산의 푸르름과 파도 소리가 문서를 작성하는 책상 위에 나타남은 정해진 분수(分數)일 터이니, 기이한 꽃들과 이상한 풀들이 모두 모여들 겁니다.

고개를 돌려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사이 돌이켜보면, 옛적에 누각이 있어 그 이름을 만경(萬景)이라 했음이 바로 여기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누각이 새로 들어선 마당에 마땅히 그 만경(萬景)이란 옛 이름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공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이다. 내가 누각(樓閣)을 세운 것은 경치를 보면서 즐기려 함이 아니었고, 유람하며 관찰을 시도하려 함도 아니었소. 옛날 문왕(文王)이 다스릴 때, 주공(周公)에겐 내치(內治)를 담당케 했고, 소공(召公)에겐 외치(外治)를 담당케 했다오.

그 교화(敎化)가 사람들에게 미치게 함이 마치 바람이 일렁거림과도 같아 다다르고[漸] ‧ 이르고[被] ‧ 미쳤다[曁]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당세(當世) 사람들이 그 덕화(德化)에 고무되지 않음이 없었고, 그 기질이 변하고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 어찌 두 분 공이 돕고 보좌하여 교화를 널리 펴는 ‘홍화(弘化)의 다스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막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이 위에 있고, 현명하게 보좌하는 대신들이 모두 공경하고 화합하여 어진 사람을 급히 구하여 밖의 지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다스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정치의 교화가 흡족하지 못한 것은 위임받은 자가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받들어 행하는 것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지방관이 날마다 이 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욕심을 방종(放縱)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 백성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주(周)나라의 다스림을 오늘에 다시 볼 수 있고, 제주의 백성들이 마땅히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듣는 자가 모두 절하고 감사해하며 이르기를, “공께서 이름 지으신 것이 능히 뒤를 잇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힘쓰게 하는 점이 있을 것이고, 우리 백성들은 길이 어진 덕화를 입는 것을 더욱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물러나 드디어 내게 와서, (현판 글씨로) ‘弘化閣(홍화각)’이란 세 글자를 써서 걸도록 하고, 아울러 기문을 써서 후세에 남길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고향 사람인 지라 의리상 사양하지 못한 채 거칠고 졸렬(拙劣)함을 헤아려보지 않고서 기문(記文)을 짓게 되었다.

시로 이르건대,

(※ 이 부분은 앞서 소개했기에 이하 생략함)

 

 

【각주(脚註) 모음】

1)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 1388~1460)은 상호군 고봉지(高鳳智)의 아들로 조천읍 교래리에서 태어났는데, 효행이 뛰어나 태종 14년(1414)에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에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주로 태종(太宗) ‧ 세종(世宗) 연간에 크게 활약하면서 문신으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기까지 했는데, 김찬흡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제주향토와 국가를 위하여 헌신했던 제주출신의 최대인물’이다. 특히 그가 지은 <홍화각기(弘化閣記)>의 내용 가운데, ‘한라산(漢拏山)’이란 명칭의 배경으로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하다.[雲漢可拏]”란 표현을 쓴 문장이 있음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2) 駕鼇頭(가오두) : 자라 머리에 올라 타다. 《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보면, “귀허(歸墟)라는 계곡으로 세상 모든 강물들이 흘러드는데, 이곳에 있던 다섯 개의 신산(神山) 가운데 대여(岱輿)와 원교(圓嶠)는 북극으로 떠내려가 침몰하고, 나머지 세 개의 삼신산(三神山)인 봉래(蓬萊) ‧ 방장(方丈) ‧ 영주(瀛洲)가 남아 이들 산을 자라들이 등에 지고 다닌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한라산은 예로부터 영주산(瀛洲山)에 비정(比定)되어 오기도 했다.

참고로 칠언율시의 독법상, 이 구절 아래로 ‘鼓角五更無事曉’가 이어지지만, 다음 줄의 첫 구절 ‘山下城居作巨州’가 둘째 구가 되고 ‘鼓角五更無事曉’는 셋째 구가 되게 읽어나가야 함이 상례(常例)이다.

3) 鼓角五更無事曉(고각오경무사효) : “오경(五更)에 울리는 고각(鼓角) 소리, 무사(無事)한 새벽이라.” 이 표현은 고려시대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문신인 조영인(趙永仁, 1133~1202)의 <안화사(安和寺)에 호종(扈從)하여 응제(應製)[扈從安和寺應製]>란 시에서 “오경에 아뢰는 각 소리 무사한 새벽이요[角奏五更無事曉],”란 구절을 차용(借用)한 것으로 보인다.

4) 謳歌(구가) : 칭송하다.

5) 甘棠惠化醫民瘼(감당혜화의민막) : “감당(甘棠)의 은혜로운 덕화(德化)로 백성들의 민폐를 다스렸다.” 감당(甘棠)은 어진 관리의 아름다운 정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최해산(崔海山)이 판목(判牧)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쓰였다. 《사기(史記)》(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편에 보면, 주(周)나라 때 소공(召公)이 북연(北燕)에 봉해져서 감당나무 아래에서 어진 정사를 펼쳤는데, 소공이 죽은 뒤에 백성들이 소공을 그리워해 감당나무를 감히 베지 못하면서 〈감당(甘棠)〉 시를 지어 기렸다고 한다.

6) 傑閣翬飛(걸각휘비) : 높은 누각과 날아갈 듯한 궁전.

7) 細柳威風(세류위풍) : 세류영(細柳營)의 엄한 군율(軍律).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흉노(匈奴)의 침입이 있자 유례(劉禮), 서려(徐厲), 주아부(周亞夫)를 장군으로 삼아, 각각 패상(霸上), 극문(棘門), 세류(細柳)에 주둔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문제(文帝)가 군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순행하면서 먼저 극문과 패상에 갔을 때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군영 안으로 들어갔는데, 세류에서는 병부를 확인한 뒤에야 천자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고, 군영 안에 들어가서도 군례(軍禮)로 뵙기를 청하였으며, 군영 안에서 말을 달리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참으로 장군다운 장군이다. 엊그제 극문과 패상의 군대는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하였다. 《사기(史記)》(권57)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편 참조.

8) 益陽侯(익양후) : 익양(益陽) 최산해(崔山海)를 두고 이름이다. 익양(益陽)은 영천(永川)의 옛 이름으로 최해산의 본관이다.

9) 正統二年丁巳(정통이년정사) : 정통(正統)은 중국 명(明) 영종(英宗)이 쓴 연호로서 재위 기간은 14년(1436~1449)으로 정통 2년은 조선조 세종(世宗) 19년으로 정사(丁巳, 1437)의 해에 해당한다.

10) 嵩高(숭고) : 산이 높고 험함. 존엄하고 고귀함.

11) 峻極(준극) : 대단히 높음.

12) 穹窿(궁륭) : 중앙은 높고 주위는 차차 낮은 하늘의 형용.

13) 丙申歲(병신세) : 병신(丙申)의 해. 곧 태종(太宗) 16년인 1416년을 지칭함.

14) 史策(사책) : 사서(史書). 예전에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죽간(竹簡)과 백견(帛絹)에 글을 적었기에 단순히 ‘사책(史冊)’이라 함과는 다르다.

15) 歸附(귀부) : 스스로 와서 복종함.

16) 懷柔(회유) : 어루만지고 달램.

17) 風移俗易(풍이속역) : 풍화(風化)가 변하고 습속(習俗)이 바뀌다. 풍속이 바뀌다. 참고로 ‘이풍역속(移風易俗)’은 풍속을 변화시킴의 뜻이 있다.

18) 歲在癸丑(세재계축) : 계축(癸丑)의 해. 곧 세종(世宗) 15년의 계축(癸丑, 1433)의 해.

19) 滌滌(척척) : 몹시 가물어 산에 초목이 없고 강에 물이 마른 모양.

20) 凋耗(조모) : 쇠하여 줄어듦.

21) 宸心(신심) : 성상(聖上)의 마음.

22) 軫慮(진려) : 마음 아파하고 걱정함.

23) 附庸(부용) :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딸리어 지내는 일.

24) 絡繹(낙역) : 왕래가 끊이지 않는 모양.

25) 草賊竊發(초적절발) : 좀도둑이 몰래 일어남.

26) 控禦(공어) : 견제하여 못하게 막음. 방어(防禦).

27) 旱暵(한한) : 날씨가 가물고 무더움.

28) 凶歉(흉겸) : 기근(飢饉). 흉년(凶年).

29) 休戚(휴척) : 기쁜 일과 슬픈 일. 편안함과 근심 걱정. 참고로 ‘휴척상관(休戚相關)’이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함’의 뜻이 있다. 곧 관계가 서로 밀접하여 이해가 일치함의 뜻이다.

30) 兩府之賢(양부지현) : 양부(兩府)의 어진 이. 여기서 ‘양부(兩府)’란 곧 ‘의정부(議政府)와 중추부(中樞府)’를 두고 이름이다.

31) 威惠(위혜) : 위엄(威嚴)과 은혜(恩惠).

32) 愼簡(신간) : 신중(愼重)하게 간택(簡擇)함.

33) 益陽(익양) : 최해산(崔海山)의 본관인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옛이름이다.

34) 甲寅(갑인) : 세종 16년 갑인(甲寅, 1434)의 해.

35) 判牧事(판목사) : 조선 시대 종2품의 벼슬.

36) 詣闕(예궐) : 대궐(大闕)에 이름. 입궐(入闕)함.

37) 憚色(탄색) : 두려워하는 기색과 표정.

38) 救荒之政(구황지정) : 기근이 들어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

39) 汲汲(급급) : 마음이 몹시 절박한 모양. 근심하여 불안한 모양.

40) 哀矜惻怛(애긍측달) : 동정해 마음 아파하며 가엾게 여김.

41) 煦濡(후유) : 은혜를 베품.

42) 餓莩者(아표자) : 굶어 죽은 자.

43) 仁壽(인수) : 인덕(仁德)이 있어서 장수(長壽)함.

44) 寃抑(원억) : 원통(寃痛)하고 억울(抑鬱)함.

45) 齋心(재심) :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일.

46) 鼓腹(고복) : 배를 두드리며 노래 곡조를 맞춤. 참고로 태평성세(太平盛世)를 누림의 뜻으로 쓰이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은 요(堯) 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무사태평을 노래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하다.

47) 蕃息(번식) : 붇고 늘어서 많아짐. 번식(繁殖).

48) 修葺(수집) : 집 ‧ 벽 등을 수리하고 고침.

49) 頹圮(퇴비) : 무너짐. 허물어짐.

50) 髡頂者(곤정자) : 머리를 깎인 죄인. 혹은 승려. 이의 용례(用例)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앙엽기(盎葉記) ‧ 대륭선호국사(大隆善護國寺)>에 보면, “또 요광효(姚廣孝)의 화상이 있는데, 용모가 맑고 점쟎게 생겼고, 중머리 바람[髡頂]으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는데, ….[又有姚廣孝畫像 咨容蕭灑 髡頂跌坐 …]”

51) 燕寢之室(연침지실) : 편히 쉬는 방.

52) 琴堂(금당) : 선정(善政)을 베푸는 수령의 청사. 이에 대한 고사가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편에 보이는데, 곧 “(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수령이 되었을 적에 마루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없이 거문고〔琴〕만 연주했는데도 잘 다스려지며 교화가 이루어졌다[宓子賤 治單父 彈鳴琴 身不下堂而單父治 後人遂稱州府縣署爲琴堂].”라고 하는 고사이다.

53) 郎舍(낭사) : 정당(正堂)의 양옆에 딸린 방. 측실(側室).

54) 案牘(안독) : 관부(官府)의 공문서(公文書).

55) 巍巍(외외) : 높고 큰 모양.

56) 翼翼(익익) : 장엄하고 웅장한 모양.

57) 塗墍(도기) : 지붕이나 담장에 진흙을 바름.

58) 丹雘(단확) : 선명한 붉은 빛의 염료.

59) 半刺贊政(반자찬정) : 판관(判官)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원래 ‘반자(半刺)’란 중국의 장사(長史)나 별가(別駕) 같은 벼슬을 말하는데, 그 소임이 자사(刺史)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렇게 이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통판(通判)을 칭하는 말로 쓰인다. 찬정(贊政)은 참정(參政) 밑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는 사람이다. 여기선 목사 밑에서 보좌하는 의미로 쓰였다.

60) 燠室(욱실) : 따뜻한 방.

61) 更漏(경루) : 경점(更點)을 알리는 물시계.

62) 纛所(독소) : 군대나 의장대에 쓰이는 깃발들을 저장하는 장소.

63) 繚(료) : 에우다. 둘러싸다.

64) 指畫(지획) : 지적(指摘)함.

65) 浩浩蕩蕩(호호탕탕) : 수세(水勢)가 웅장한 모양.

66) 鬱鬱䓗䓗(울울총총) : 초목이 푸르고 빽빽하게 우거진 모양. 여기서 ‘䓗(총)’은 ‘葱(총)’과 동자(同字)이다.

67) 驊騮(화류) : 주 목왕(周穆王)이 탔다는 팔준마(八駿馬)의 하나.

68) 風雲之狀 月露之形(풍운지상 월로지형) :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의 형상(形狀). 본래 ‘월로풍운(月露風雲)’이란 시문을 짓는데 달 ‧ 이슬 ‧ 바람 ‧ 구름을 묘사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용(無用) 무익(無益)한 문사(文詞)의 비유로 쓰이는 말이다.

60) 承命(승명) : (임금님의) 명(命)을 받들다. 결국 여기서 ‘承命于玆(승명우자)’라 함은 ‘임금님의 명을 받들고 이 지역에 온 분’이란 뜻이기에 도안무사겸판목사(都安撫使兼判牧事) 최해산(崔海山)을 두고 이름이다.

70) 常分(상분) : 정해진 분수.

71) 几案(궤안) : 책상. 탁자. 문서(文書)를 작성함을 이름.

72) 悉萃(실췌) : 모두 다 모이다.

73) 顧眄(고면) : 고개를 돌려봄. 또는 곁눈질함. 득의양양한 모양. 좌고우면(左顧右眄).

74) 翫景(완경) : 경치를 보면서 즐김.

75) 遊觀(유관) : 유람(遊覽)하며 관찰함. 이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이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下)>편에 보인다. 곧, 제 경공(齊景公)이 안자(晏子)에게 성왕(聖王)들이 유관(遊觀)을 행하는 법을 묻자, 안자가 “천자가 제후에게 가는 것을 순수(巡狩)라 하고 제후가 천자에게 가는 것을 술직(述職)이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일이 아닌 것이 없어 봄에는 농사짓는 것을 살펴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가을에는 수확하는 것을 살펴 충분치 않은 것을 돕는다.”라고 한 고사를 인용하여, 맹자가 제후의 유관(遊觀)을 경계하였다.

76) 漸之被之曁之(점지피지기지) : ‘다다르고 이르고 미친다.’ 이 표현은 《서경(書經)》 <우공(禹貢)>편 말미에,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다다랐고, 서쪽으로는 유사에까지 이르렀으며, 북쪽과 남쪽에도 모두 그 힘이 미쳐, 우(禹)의 명성과 교화가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 聲敎訖于四海].”라고 함에서다.

77) 贊襄(찬양) : 도움. 찬조(贊助).

78) 弘化(홍화) : 교화(敎化)를 널리 펴는 것.

79) 元臣碩輔(원신석보) : 현명하게 보좌하는 대신(大臣).

80) 同寅協共(동인협공) : 다 함께 경건하고 공손한 자세로 화합함.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에서 ‘동인협공(同寅協恭)’이라 하였는데, 그 주에 “군신은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함을 함께하고 공경함을 합쳐야 한다.〔君臣當同其寅畏 協其恭敬〕”고 하였다.

81) 分憂(분우) : 지방관(地方官). 지방관은 임금의 근심을 나눈다는 뜻임.

82) 佚遊(일유) : 방탕한 짓을 하며 마음대로 놂.

83) 縱欲(종욕) : 하고 싶은 대로 다함.

84) 継継(계계) : 끊임없이 계속 이어짐. 여기서 ‘継(계)’는 ‘繼(계)’의 속자(俗字)임.

 

 

필자소개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태생

- 어린 시절부터 한학(漢學)과 서예(書藝) 독학(獨學)

외조부에게서 《천자문(千字文)》 ‧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기초 한문 학습

 

주요 논문 및 저서

(1) 논문 : <공자(孔子)의 음악사상>, <일본에 건너간 탐라의 음악 - 도라악(度羅樂) 연구>, <한국오페라 ‘춘향전(春香傳)’에 관한 연구>, <동굴의 자연음향과 음악적 활용 가치>, <15세기 제주 유배인 홍유손(洪裕孫) 연구>, <제주 오현(五賢)의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 등

(2) 단행본 저술 : 《엔리코 카루소》(1996), 《악(樂) ‧ 관(觀) ‧ 심(深)》(2003), 《방선문(訪仙門)》(2004), 《취병담(翠屛潭)》(2006),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2008), 《우도가(牛島歌)》(2010), 《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2011), 《귤록(橘錄)》(2016), 《청용만고(聽舂漫稿)》(2018)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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