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학생 수 감소로 1992년 3월 1일 폐교..상천리 상천분교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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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학생 수 감소로 1992년 3월 1일 폐교..상천리 상천분교장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27 0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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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75㎡ 규모의 옛 교사(校舍)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천리 상천분교장 터

위치 ; 상천리 470-2번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교육기관(터)

상천리_상천분교장터 공덕비
상천리_상천분교장터


안덕면 상천리는 40여 세대에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 리사무소와는 직선거리 100m도 안 되는 곳에 상천분교장 터가 있다.

창천초등학교에 소속되었던 상천분교장은 1962년 5월 1일 문을 열었다가(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에는 창천초등학교 항목에서 상천분교장 설립을 1962년 4월 6일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가일로 추정됨) 학생 수 감소로 1992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1946년에 상천리 주민들과 이웃 마을인 광평리 주민들은 상천리와 광평리를 한 학구(學區)로 하는 상광분교장 설립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4·3사건으로 마을은 불에 타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면서 학교 설립의 움직임은 중단됐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상천리가 다시 재건되고 각지로 흩어졌던 주민들이 하나 둘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다시 아이들의 배움터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박득환 이장을 중심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 8년만인 1962년 4월 6일 창천초등학교 상천분교장 설립이 인가되고 5월 1일 개교됐다.

당시 이 마을 김신석씨가 5190㎡, 최경동씨가 702㎡, 김행부씨가 330㎡의 학교 부지를 기증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말이 학교지 어린이들은 교실이 없는 학교에서 노천수업을 받다가 그 해 한·미 협조(UNITED STATES-KOREA COOPERATION) 아래 75㎡ 규모의 교실 1동이 신축되면서 학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ᄆᆞᆯ방애 아랫돌 위에 엎어놓은 윗돌 위에 《金申石望思碑》가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은 〈앞 鄕土發展 眞心竭力 廣場校地 誠心喜捨 뒤 分校開設協助喜捨者芳名 金申石 金仟五百원 朴明鶴 金仟三百원 洪乙花 金仟三百원 李亥孫 金五百원 池永旭 金三百五拾원 洪申吉 金三百원 高南基 金三百원 崔敬東 金貳百원 秦相老 金百五拾원 朴泰奉 金百원 廣坪靑年會 金八百원 安德面長 金三百원 우측 開設協助者 高奎錫 開校敎師 金己錫 五月一日 開校 開校判定官 道知事 金榮寬 좌측 西紀一九六二年十月一日 上川分校開設者里長 朴得煥 謹立〉이다.

비석 제목은 金申石望思碑이며 앞면에는 김신석에 대한 문장을 쓰고, 뒷면에는 희사자 명단을 넣었다.

입구에 세워진 《배움의 옛터》 표석에는 〈이곳은 창천초등학교 상천분교장의 배움의 옛터입니다. 1962년 5월 1일 개교하여 30년 동안 150명의 어린이들이 힘써 배우고 몸과 마음을 닦아오다가 취학 어린이의 감소로 아쉽게도 1992년 3월 1일 창천국민학교에 통합되었고 총 14회에 걸쳐 103명이 졸업한 자리임을 길이 남기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1994.11. 창천국민학교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75㎡ 규모의 옛 교사(校舍)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2014년 현재 모록밭목공교실이라는 이름의 목공예 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모록밭은 상천리의 옛 이름으로 백록담의 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 이 마을 모록괴를 찾아 새끼를 쳐 모록밭이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제주新보 2014.08.19.)
《작성 19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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