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조선후기 공무 보던..신촌리 신촌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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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조선후기 공무 보던..신촌리 신촌향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7.0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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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까지 이(里)사무소로 사용..도 지정문화재로 보존


신촌리 신촌향사

 
제주도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1975년 3월 12일 지정)
위치 ; 조천읍 신촌리 2156-1번지(신촌5길 27)
시대 ; 조선
유형 ; 관청 건물

 

 

 

신촌리는 약 700여 년 전 처음으로 마을이 세워졌으며 고려시대 충렬왕26년(1300)에는 신촌현(新村縣)이었다.

신촌리는 옛 이름인 새마을에서 유래하였으며 여러 문헌에 일찍부터 신촌(新村)으로 표기되었으나 왜 이곳을 새마을이라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약 400여 년 전에 웃마을 숙군 일대에 마을이 들어서고 그 후 해안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태종16년(1416) 행정체제 개편 때 제주목에 속했으며, 광해군원년(1609) 판관 김치가 제주에 동서방리를 설치할 때 본주(제주목)의 좌면에 속하였다.

『증보탐라지』에는 '좌면(左面)'을 네 개의 소면(小面)으로 나누었는데, 신촌면(新村面), 조천관면(朝天館面)이 조천읍 지역에 있었다. 『호구총수』(1789년)에는 신촌면(新村面) 소속으로 되어 있고, 고종11년(1874)에는 신좌면에 속하였다. 『제주읍지』(1899)에는 좌면(左面) 소속으로 되어 있다.

『삼군호구가간총책』(1904)에는 제주군 신좌면(新左面)으로 되어 있다. 『조선지형도』(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발행)에도 제주군 신좌면으로 표기되어 있다.(한국지명유래집)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문이었던 조천포구가 있는 조천마을과 이웃해 있다.


신촌향사는 조선 후기에 지방의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향사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건물은 원래 신촌마을의 중동(中洞) 길가 왼쪽에 있었으나, 그 위치가 적당하지 않아 순조5년(1805)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그 후 1817년에 개건되었고, 철종3년(1852)에는 새로 문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는데, 고종14년(1877)에는 동장 겸 경민장인 김진경(金振鏡)이 중심이 되어 이 건물을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그 후 이 향사는 1977년까지 이(里)사무소로 사용되다가 건물이 노후하였기 때문에 이사무소를 새로 신축하여 이전한 뒤, 오늘날에는 도 지정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4년 2월에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때 관리사도 신축하였다.


현장에 세워진 신촌향사 복원기에는 〈西紀1608年(光海君元年)에 中洞道路邊에 建立하였다가 西紀1806年(純祖5年) 現位置로 移建하였으며 西紀1975年3月12日 地方有形文化財 第8號로 指定되어 西紀1984年2月26日 總豫算7500萬원을 投資하여 復元하였음. 西紀1984年5月8日 復元者 北濟州郡守 金奉洙 記碑建立 新村里長 高銖根〉이라고 새겨져 있다. (※광해군 원년은 서기1609년, 순조5년은 서기1805년임)


신촌향사는 기와집으로 면적이 95㎡(28.8평)이다. 정면은 6칸(현장의 안내판에는 7칸으로 됨)이며 왼쪽에 툇간이 딸려 있고, 측면은 2칸에 전후퇴가 있는 우진각 지붕의 기와집이며 천정은 벽회바름이다.

전면퇴는 개방되어 있고 내진주에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면은 퇴기둥에 심벽을 치고 간마다 판장문(널문)을 달았다.


앞툇간에는 현무암 반석을 깔았고, 내부의 한쪽은 방이고 다른 한쪽은 부엌과 찬방으로 꾸며졌다. 나머지는 모두 판청으로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외벽은 현무암으로 흙을 넣어서 쌓았는데, 기둥은 모기둥이고 나머지 부재들 역시 민가처럼 각재로 된 7량 집이다.

제주의 일반민가와 비교할 때 규모가 크고 중앙의 대청이 넓다. 그러나 구조방식이나 간살나누기 등은 민가와 거의 같다. 우리나라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유구(遺構)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우리나라에 별로 많지 않은 용도의 건물이다.


여러 번의 개조를 거치는 동안 원형이 많이 변경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최근(1984년) 보수 때 침수를 피하기 위하여 지반을 높임으로써 본래의 공간 분위기는 거의 상실했다.(제주의 문화재,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현지의 안내판) 필자가 1980년경에 보았을 때에는 마당이 길에 비하여 어른 키보다 더 낮은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이곳에서 마을제(포제)를 지낸다.

《참고》①동서방리(東西坊里) 설치 ; 제주목은 중면․좌면․우면으로, 정의현은 중면․좌면․우면으로, 대정현은 좌면․우면으로 행정 구역을 나누어 면(面)에는 도약정(都約正) 1명과 약정(約正) 2명, 그리고 관리 3명을 두었다.


②퇴 ; 평면으로 볼 때 추녀 끝에서 외벽까지의 공간


③우진각 ;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기와로 쌓아 올린 지붕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을 가진 집(또는 지붕)으로 4면에 모두 지붕면이 만들어진다. 지붕을 전후면에서 볼 때는 사다리꼴이고 양측면에서 보면 삼각형이다. 용마루와 추녀마루만 있고 내림마루가 없다.


④내진주(內陣柱) ; 안둘렛기둥


⑤세살문 ; 울거미를 짜고 그 안에 가는 살을 가로세로로 좁게 댄 문. 세전문이라고도 하며 띠살문, 격자살문, 빗살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⑥심벽 ; 목조 건물에서, 기둥을 벽면보다 두드러지게 만든 벽.


⑦우물마루 ; 한옥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마루형식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장귀틀을 건너지르고 장귀틀 사이에는 동귀틀을 일정한 간격으로 건너지른 다음 동귀틀 사이를 마루청판을 끼워 마감하는 마루 형식이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건조 수축이 심한 한국적인 기후에 적합하다. 나무가 건조되어 마루청판 사이가 벌어지면 마루를 다 뜯지 않아도 한 장 한 장 촘촘히 밀어 넣고 마지막장을 한 장 더 보강해 넣으면 되는 효율적인 마루 형식이다.


《작성 041031, 보완 1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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