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교각 둥글게 만들어진 문..건입동 홍문(虹門)과 죽서루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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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교각 둥글게 만들어진 문..건입동 홍문(虹門)과 죽서루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0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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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내 일제강점기 동안 그림엽서 소재로 유포

건입동 홍문(虹門)과 죽서루 터

 

위치 ; 산지천 북성교 자리
유형 ; 기타석조물
시대 ; 조선

산지천_북수구(1910년대)

 

산지천북성교

 

여기서 虹은 무지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홍문은 내를 가로질러 교각 부분이 둥글게 만들어진 문이다. 북성 옆에 세워진 표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제주성 북수구로 홍문이 있던 터다. 처음 죽서루가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되고 효종3년(1652) 목사 이원진이 보수하면서 공진루를 세웠다. 그 뒤에 홍수가 날 때마다 무너져 내려 아예 문루를 없애고 홍문만 세웠다. 이 홍문도 1927년 홍수로 유실되었다.》


1600년 성윤문 목사 때 수구를 만들고 그 다리 위에 죽서루(竹西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이 다리를 만들 때 있었던 일화가 구전으로 내려 온다. 사철 큰 물이 흐르는 산지천 위에 다리를 세우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목사가 방을 내걸었다.

이곳에 다리를 세운다면 양반이면 큰 상을 내릴 것이고, 상민이면 온갖 부역을 면제케 할 것이며, 비천한 자는 신분을 상민으로 고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방을 보고 한 석수(石手)가 나서며 목사에게 나무들을 충분히 마련해 준다면 한번 세워보겠다고 했다.

물 흐르는 하천 위에 다리를 세우려면 물을 막아야 하는데, 그 석수는 나무단을 쌓음으로써 물을 통과시키며 다리골조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한라일보 090105) 현재 북성교를 세운 곳이 북성 홍문이 있었던 곳이다.


한말의 문장가이며 외무대신을 지낸 운양 김윤식이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속음청사'를 보면 홍예교에 관련된 기록이 들어있다.

"(공신루에서) 석성(石城)과 마주치는 데를 굽어보니 수구에 홍예문이 지어져 그 위를 사람들이 왕래한다. 수문의 바깥은 백규(跬=蹞=반걸음규.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약 35m)의 둑으로 둘러싸인 연못에 봄물이 넘실거리는데 오리떼가 열을 짓고 있다. 제방 위에는 버드나무가 빙 둘러있고, 언덕 위에 집들이 있어 복숭아꽃이 곳곳마다 활짝 피어있다. 그림과 같은 풍경이다. 공신정 밑에는 세 곳에서 샘이 솟는데 천품(泉品)이 뛰어나다"라고 했다.


이 다리는 1909년 다케노 세이기치 그림에는 가운데 교각이 있는 쌍안교로 그려져 있다.(쌍안교는 남수각다리였는데 홍문을 쌍안교로 그린 점은 이상하다)

주변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동안 그림엽서의 소재로 유포되었으며, 일본 고건축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일본 건축월간지 「조선과 건축」1925년 7월호에 ‘홍교(虹橋)’라고 소개하였는데 가운데 교각이 없는 사진이다.

원래 1910년대까지는 난간이 없었지만 이 시기에는 동자석과 용두석으로 구성된 난간이 있는 다리로 바뀌었다.

1927년 8월에 홍수로 유실됐지만 ‘제주도 안경교’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朝鮮』1927년 10월호 표지사진으로 실리기도 했고, 6년 후인 1933년에도 『朝鮮古蹟圖譜』에 소개되었다.(한라일보 20130529)
《작성 1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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