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격변의 시대사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 교회’..하모리 모슬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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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격변의 시대사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 교회’..하모리 모슬포교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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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공부한 가파도 출신 고수선씨, 경성의전 졸업 제주 최초의 여의사 돼..여성 계몽, 독립운동 앞장

하모리 모슬포교회

 

위치 ; 대정읍 하모리 1218-1번지
시대 ; 대한제국
유형 ; 종교시설(장로교회)

모슬포교회

 


모슬포교회는 제주 기독교 신앙의 발자취를 통해 일제 강점기와 4·3, 6·25전쟁 등 격변의 시대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 교회’로 꼽히고 있다.

제주지역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로 평양 출신인 이기풍 목사는 조선 말기인 1908년 제주도에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처음으로 뿌렸다.

전도 활동에 나선 그는 1909년 9월 서귀포시 대정읍 교인(신창호)의 집을 ‘모슬포교회’로 정해 예배를 올렸다. 이로서 산남지역에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게 됐고, 이 교회의 1대 목사가 됐다.


그는 위협을 받거나 적대하는 눈초리 속에서도 선교 활동을 이어갔다. 1901년 대정읍에선 주민과 천주교인들이 충돌하는 ‘이재수의 난’이 벌어지는 등 서양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에 개신교의 뿌리를 내린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을 벌이다 심한 고문을 받았고, 1942년 여수에서 순교했다.


2대 목사인 윤식명 목사는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1920년 조선의 광복을 염원하며 광선의숙(光鮮義塾)을 대정읍 하모리에 설립, 신교육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곳에서 공부한 가파도 출신의 고수선씨는 경성의전을 졸업해 제주 최초의 여의사가 됐고, 여성 계몽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모슬포교회가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해방 후 닥친 4·3의 광풍은 모슬포교회를 비롯해 도내 교회마다 순교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기풍 목사의 제자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제주 출신 1호 목사인 이도종 목사는 1948년 순회 예배를 가던 중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 마을에서 무장대에 붙잡혔다.

그는 미국인에 의해 전해진 기독교의 목사로서 미국의 스파이, 양놈의 사상을 전하는 예수쟁이로 몰려 구덩이에 파묻혀 생매장을 당했다. 그의 순교비는 대정교회에 마련돼 있다.


이어 사회 구제운동에 앞장서 왔던 모슬포교회 허성재 장로는 둘째 아들이 우익 청년단장에 있다는 이유로 죽창에 찔려 숨을 거뒀다. 제주 기독교 역사에선 4·3으로 17명의 성도가 순교했다고 밝히고 있다.


8대 목사로 부임한 조남수 목사는 ‘산사람’으로 몰린 양민 2000여 명을 살려내면서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고 있다. 1948년 수많은 양민들은 밤에 들어 닥친 무장대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쌀과 돈, 양말을 내주었다.

군경은 무장대를 토벌하고 노획한 문서에서 협조한 양민들의 명단을 찾아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양민들을 위해 조 목사는 문형순 모슬포3구 경찰서장을 찾아가 ‘목숨을 위해서 내준 것이니 절대로 죄가 아니다’라며 설득을 했다.

자수하는 사람은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여 살려줘야 한다고 담판을 짓고 자수 강연에 나섰다. 조 목사는 자수를 했다가 처벌을 받으면 ‘내가 먼저 자결을 하겠다’며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대정을 비롯해 한림·화순·중문·서귀포에 이르기까지 150여 회의 강연에서 3000여 명의 자수자를 얻었고, 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됐다.

특히 무장대의 압력으로 삐라를 전달하게 된 대정읍 주민 20명은 총살을 앞두고 조 목사가 개과천선에 책임지겠다고 군경에 애원해 살아남게 됐다.

우영하 대정면장의 아들이었던 대정초등교 우성대(1925∼사망년도 미상) 교사는 1947년 3·1절 도민 파업 사건에 연루돼 죽음 일보 직전에서 조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우 교사는 이를 계기로 세례를 받은 후 모슬포교회 10대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목숨을 건졌던 주민들은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1996년 모슬포 진개동산에 ‘조남수 목사 공덕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


아울러 모슬포교회는 6·25전쟁 당시 피난민 150명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이처럼 모슬포교회는 산남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주민들을 외면하지 않고, 약자들의 편에 서서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등 교회의 선교 역사가 제주의 역사로 남게 됐다.(제주일보 130618)

모슬포교회 연혁(숫자 00은 미상월 또는 미상일)


19080200 조선야소교장노회독노회에서 조선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7인 중 1명을 제주도 순회전도목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하여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파송됨


19090901 제주 산남 지역 선교를 위해 신창호의 집을 기도처로 정하고 《모슬리교회》라 칭하고 첫예배를 드림


19130000 대정읍 하모리 988번지 초가사간에서 예배
19200000 광선의숙 설립(윤식명 목사), 유치반~보통학교 고급반 운영


19220531 제주도 모슬포교회에서 구역 내 각 교회를 합하여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기풍, 도대선, 이경필이 교사였다. 새벽기도회, 하오 공부, 저녁 전도회를 통해 은혜를 받았으며, 특히 저녁에는 이기풍 목사의 열렬한 강도에 신자들이 통회하였다.(기독신보 제7권 제42호 / 제338호 / 68쪽)


19240505 조창권, 최정숙 장로의 임직으로 모슬포교회 당회 조직
19260000 대정읍 하모리 1075번지에 교회당 건축 착공
19290000 일제의 탄압으로 광선의숙 폐숙


19370000 대정읍교회(현 대정교회) 분립
19390000 영락리교회(현 무릉교회) 분립
19430000 신사참배와 일본어로 예배하라는 일제의 강요에 침묵설교로 대항하던 조의환 목사 강제사임당함


19440000 일본군에 예배당을 빼앗겨 일본 헌병대 본부로 사용
19470000 조남수 목사 부임
19481100 허성재 장로 무장대에게 피살당함


20050400 모슬포교회 당회록과 제주노회록이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역사유물로 지정됨
20060900 옛모슬포교회당(현 사회교육관)이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의 역사유적교회로 지정됨(모슬포교회 홈피 연혁 발췌)


위 사진 하모리 모슬포교회 교회당은 1959년5월 착공하여 12월 준공한 것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모슬포교회는 1910년 최초로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새로운 교회당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가회교육원 강당으로 기능전환하였다.

출입구는 전면 박공벽에 포지를 두었으며, 측벽부에 Buttress를 모사한 부분이 덧붙여 있다. 창문 개구부는 원형 Arch로 되어 있고 전면 포지에도 원형 Arch로 되어 있다. 원래의 현무암 벽체 위에 몰탈과 페인트로 마감하는 수리가 있었다.(제주도근대문화유산조사및목록화보고서 82쪽)
《작성 1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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