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선시대 정청(政廳: 업무를 보는 관청)..삼도2동 제주목관아연희각(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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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선시대 정청(政廳: 업무를 보는 관청)..삼도2동 제주목관아연희각(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1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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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삼도2동 제주목관아연희각(복원)

 

延曦閣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제주목관아 내 서쪽 줄에서 맨 북쪽 건물
유형 ; 관아
시대 ; 조선

삼도2동_연희각

 

삼도2동_연희각 東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 중심지였던 제주 관아는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을 포함해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曦閣), 우연당(友蓮堂), 영주협당(瀛洲協堂), 외대문(外大門), 귤림당(橘林堂), 중대문(中大門), 망경루(望京樓), 회랑(回廊) 등으로 구성됐다.


연희각은 조선시대의 정청(政廳: 업무를 보는 관청)이다.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연희각은 안무사(按撫使), 절제사(節制使), 목사(牧使), 관찰사(觀察使), 군수(郡守) 등의 집정당(執政堂)으로서, 이곳에서 제주 사람의 안위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속칭 상아동헌(上衙東軒)이라고도 불렸다.


건축 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1640)의 시(詩)가 부기(附記)되어 있고 또 이 때 목사의 겸직(兼職)이었던 절제사(節制使)가 방어사(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의 겸직은 仁祖20년(1642)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肅宗39(1713)부터 다시 방어사라 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은 高宗21년(1884)에 홍규(洪圭) 목사가 중수(重修)하였다.


1924년 여름에 제주도청이 건축될 당시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1990년대에 복원되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의 1단계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연희각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 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복원되었다. 면적은 136.63㎡(41.33평)이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작성 1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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