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고득종으로 하여금 記를 짓게 한.. 삼도2동 제주목관아홍화각(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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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고득종으로 하여금 記를 짓게 한.. 삼도2동 제주목관아홍화각(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1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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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弘化閣記(홍화각기)와 홍화각 액자는 모두 고양부삼성사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삼도2동 제주목관아홍화각(복원)

 

弘化閣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제주목관아 내 연희각 남쪽 건물
유형 ; 관아
시대 ; 조선

삼도2동_제주목관아홍화각 東.

 

삼도2동_제주목관아홍화각

 


세종 때 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에 타 없어지자 世宗17년(1435) 濟州節制使 崔海山이 못 쓰게 된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절제사영청(營廳) 3칸을 새로 짓고 옛 이름 만경루(萬景樓)를 고쳐 홍화각이라 하고, 고득종으로 하여금 記를 짓게 했다.

이때 침실, 욕실, 독서방, 금당(琴堂), 정당(政堂) 등 206칸도 세종16년(1434)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성하였다. 홍화각은 안무사영(按撫使營) 또는 영리청(營吏廳)이라고도 했다.


仁祖26년(1648) 11월18일에 목사 金汝水가 중수를 시작하여 인조27년(1649) 1월 8일에 완성하였다. 안무사 및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되다가 숙종39년(1713) 제주목이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제주목사가 방어사를 겸하면서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으로 사용되었다.

홍화각이 영청이라 불리게 된 것은 제주목사가 전라도관찰사의 임무를 일부 넘겨 받아 대정현감·정의현감을 지휘, 감독하여 제주도의 전권을 장악한 데서 유래한다. 英祖48년(1772)에 목사 梁世絢이 重修하고, 純祖29년(1829) 李行敎, 김영수 목사가 改建했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훼철(毁撤)되었으며, 현재 고득종(高得宗)이 쓴 홍화각(弘化閣)'이란 편액(扁額)과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새겨진 현판(懸板)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현판(懸板)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이며,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7량(樑)이다. 공포(栱包)는 외1출목(外一出目) 이익공(二翼工)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1997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되어 1998년 7월 20일에 마친 제주목 관아터의 제4차 발굴 때 외대문, 중대문, 홍화각, 애매헌, 호고, 호적고, 우연당, 예고, 예리장방, 성내 연못, 우물 유구와 담장 터가 확인됨에 따라 18세기의 모든 관아의 배치가 확인되었다. 1999년 홍화각 및 관아와 외대문, 중대문, 연못, 담장 등이 복원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이도2동誌 187쪽)

弘化閣 등 官衙 건물의 건립 전말을 판각한 記文으로 홍화각기가 남아 있다. 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탄 뒤인 세종17년(1435)에 崔海山 안무사가 홍화각 등 여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弘化閣記는 바로 그 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高得宗이 지은 글이다. 다음은 그 기문의 일부이다.


〈公(崔海山)이 政事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하여지자, 館宇의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폐허가 되어버린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타는 당과 욕실, 부엌, 郎舍(낭사)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한 칸을 세워서 당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굉걸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半刺의 당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간을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門樓(문루)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창고와 기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하여 모두 서 있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며, 집이 도합 2백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하지 않는 것은 화재를 예방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정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의 지시와 규획에서 나왔다.


(중략)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자가 날마다 이 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王化를 넓히고, 백성의 사정을 상달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제주 백성들이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弘化(홍화)'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

홍화란 聖君(성군)의 덕을 온누리에 널리 알리고 德化(덕화)로써 백성을 다스린다. 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임을 천명하였다.

글 전체의 내용은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우선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善治(선치)를 찬양하였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 내력과 홍화각이라 명각한 이유를 적고 있다.

또 '홍화각'이란 題額(제액) 세 글자도 고득종 자신이 직접 써서 게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현재 弘化閣記(홍화각기 263×67.5cm)와 홍화각(163×65.5cm) 액자는 모두 고양부삼성사재단에 소장되어 있다.(제주특별자치도 역사문화예술 홈피)


2011년 고양부삼성사재단이 문화재 지정을 요청함에 따라 충북대 목재연륜소재은행이 제작연대를 측정한 결과 목재의 연륜연대는 1288∼1324년(95.4% 신뢰 구간)이고, 본판은 비자나무, 뒷면 세로 목은 벚나무 속으로 확인됐다.

홍화각을 처음 지을 당시인 1435년에 편액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던 1474년에 만들어진 숭례문 현판보다도 제작 시기가 앞서는 것이다.(연합뉴스 110819)
《작성 130628, 보완 17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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