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각종 연회와 공물 봉진하던 장소..삼도2동 제주목관아우련당(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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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각종 연회와 공물 봉진하던 장소..삼도2동 제주목관아우련당(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17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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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과 우련당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복원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삼도2동 제주목관아우련당(복원)

 

友蓮堂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제주목관아 내 연희각 남쪽 건물
유형 ; 관아
시대 ; 조선

 

삼도2동_제주목관아우련당

 


우련당은 목사가 주재하는 각종 연회를 개최하고 공물을 봉진하던 장소이다. '우련'은 연꽃을 벗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中宗21년(1526)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敵이 침입하여 城을 포위하거나 火災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문화재청 홈페이지)

이수동은 중종1년(1506) 문과 별시에서 정과(丁科)로 급제하였고, 중종9년(1514) 사간원정언을 거쳐 중종11년(1516)년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중종21년(1526) 4월 김흠조(金欽祖)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모흥혈(毛興穴) 내에 돌담장을 축조하고 붉은 대문을 세워 삼성(三姓)의 자손들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삼성혈비도 1526년 이수동 목사가 처음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5방호소(防護所)에 귤유(橘柚)를 심어서 진공에 대비케 하였다. 국둔전(國屯田)을 철폐하는 등 많은 공적을 쌓은 공을 기리기 위해 1911년 6월 삼성혈에 선정비(使相李壽童紀念碑)가 세워졌다. 중종22년(1527) 6월 호조참판에 임명되어 떠났으며, 중종29년(1534)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뒤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平地)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楊大樹)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되었다.

양대수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13년(1580) 2월 전라도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였고, 선조17년(1584) 3월 보성군수에 임명되었다.

선조20년(1587)과 선조21년(1588)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 녹둔도를 두고 벌어진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1588년 2차 녹둔도 전투에서 온성부사 양대수는 회령부사 변언수(邊彦琇), 부령부사 이지시(李之詩)와 함께 여진 촌락 200여 호를 불태우고 여진족 380명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재임하다가 선조25년(1592) 3월 이옥(李沃)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재임 중 1592년 6월 성곽을 순시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


肅宗20년(1694) 9월에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중건(重建)하였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亭子)를 중수(重修)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改名)하여 공물(貢物)을 봉진(封進)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문화재청 홈페이지)

즉, '향의실기(享儀室記)'에 의하면, 【서경(書經)】 낙고편(洛誥篇)에 "공물(貢物)을 바치는 데는 의식(儀式)이 많은데, 의식(儀式)에 바치는 물건의 정성(精誠)에 미치지 못하면 공물을 잘 바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을 향(享)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는 것을 의(儀)라 하니, 이에 그 집의 편액(扁額)을 고쳐서 향의(享儀)라 한다고 하였다. 후일 자연적으로 매립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시에서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목 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사적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攬)』 등 당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지난 2002년 12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문화재청 홈페이지)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1평)이다. 우련당 동쪽 앞에 사각형으로 복원한 연못에는 잉어와 붕어를 많이 기르고 있어서 찾아오는 손님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끄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자료에 의하면 ‘못 위에' 혹은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우련당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 복원된 것은 연못과 우련당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 복원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작성 1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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