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군관(軍官)들 근무하던 관청..삼도2동 제주목관아영주협당(군관청,공제당)(복원)
상태바
[향토문화] 군관(軍官)들 근무하던 관청..삼도2동 제주목관아영주협당(군관청,공제당)(복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18 0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고 한다.

삼도2동 제주목관아영주협당(군관청,공제당)(복원)

 

瀛洲協堂,共濟堂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제주목관아 내. 외대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동쪽)에 있다.
유형 ; 관아
시대 ; 조선

삼도2동_제주목관아군관청(제주전최)
삼도2동_제주목관아영주협당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이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人이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御使)가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군관들이 왕래할 때에는 항상 말(馬)이 지급(支給)되었으나 사사로이 말(馬)을 소지(所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영주협당의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고 한다.


순조32년(1832)에 한응호(韓應浩) 목사(牧使)에 의해 중건(重建)되면서 공제당(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한응호가 〈共濟堂을 상아 동쪽에 세워 군관집무소로 사용케 하였다〉고 하였으나 중건(또는 중수)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목사를 지냈던 응와 이원조가 1843년 李潞夏에게서 받은 간찰에도 ‘공제당 가운데 있는 듯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어 이후는 계속 공제당이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는 경찰서를 공제당 옛 터에 옮겨 세우면서 완전히 멸실되었다가 1999년 복원되었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7.7㎡(32.58평)이다.

필자의 의견 ; 제주목관아는 1702년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명칭인 군관청을 복원하지 않고 영주협당으로 복원한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한다.

위의 사진은 탐라순력도 제주전최에 나타난 군관청인데 맞배지붕으로 그려져 있다. 복원된 지금 건물(영주협당)과는 지붕모양이 다르다.
《작성 13063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