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법정사 항일 거사 중군대장 참여..연동 양남구(梁南求)묘
상태바
[향토문화] 법정사 항일 거사 중군대장 참여..연동 양남구(梁南求)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21 0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18년 10월 5일 중문면 주민들 선동 일본 경찰 축출시위 중문 주재소 습격 체포

연동 양남구(梁南求)묘

 

위치 ; 제주시 연동 1135번지
관련 ; 무오년 중문(中文)면 법정사의 항일 운동.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생존기간 : 1892(고종 29) ~ 1976

 

노형동_양남구묘

 

 


자는 왕석(王石). 호는 낙천(樂泉). 원적(原籍)은 조천읍 조천(朝天)리이며 본관은 제주. 양용환(梁用環)의 아들로 제주시 용담(龍潭)동에서 태어나 서귀읍 서홍리(西烘里.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는 도순동이라고 되어 있음)로 옮겨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의 탄압과 착취 등 온갖 횡포에 격분, 구국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온 김연일은 중문면에 있는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1918년 당시 법정사에는 김연일(金蓮日), 정구용(鄭九龍), 장임호(張林虎) 등 7명이 입도,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와 방동화(房東華)가 함께 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동년 6월경 산북 산천단(山川壇)에서 항일 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 기도에 들어갔다. 동년 8월 방동화는 선도교(仙道敎) 수령 박명수(朴明洙:일명 주석)를 찾아가 찬성을 얻으면서 선도교 세력을 운동에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선도교는 1922년에 이르러 보천교(普天敎)로 개칭된 종교로써 도내에 세칭 2만여 명이란 교도를 가진 민족 종교였다.

김연일과 함께 하는 항일 세력은 1918년 9월 19일(음 8월 15일) 법정사에서 행하여지는 불교 의식인 우란분제(盂蘭盆祭)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여 명에게 저항 의지를 밝혔다.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하여 제시했다.


서귀면과 중문면의 이장(里長)은 장정을 모아 10월 7일 하원(河源) 마을에 집합하라는 통보를 내리고 ‘10월 8일 제주 성안을 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군법에 처한다.’는 격문을 돌렸다.

동 10월 5일 장정 33명을 법정사에 소집시켜 군대 조직으로 편성한 후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고 박명수를 도대장(都大將), 방동화와 강민수를 좌ㆍ우대장, 또 양남구(梁南球)를 중군대장, 김삼만(金三萬)을 후군대장으로, 장임호를 모사(謀師)로 삼았다.


김연일은 박명수와 실행 방안을 논의하여 우선 서귀포와 중문리를 공격한 뒤 제주 성내로 진입하기로 정했다. 인원 동원 방법은, 봉기군이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각 마을 이장으로부터 민적부를 제출받기로 하였다.

동 10월 7일 새벽 김연일, 김인수(金仁秀), 김용충(金用忠) 등은 법정사에 머물고, 법정사에 집결한 봉기군은 서귀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먼저 도순(道順)리 상동에서 5명 정도를 설득시켜 봉기군에 가담시켰으며 이어 영남(瀛南)리에서 이장 강임준에게 민적부(民籍簿)를 제출하도록 하여 25명의 장정을 징발, 또 강정리에서 30여명을, 그리고 서호(西好), 호근(好近)리에서도 가담자를 확보하였다.


이 때 선봉에 있던 강창규는 봉기군에 명령하여 전주(電柱) 2본을 절단함으로써 제주 성내와의 통신을 차단해 버렸다. 하원리에 이르니 봉기군은 3백 내지 4백 명에 이르러 먼저 중문 경찰관주재소를 무차별 파괴하고 전소시켜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 경관 3명을 포박하여 응징하였다.


또, 외래 사상의 배격이란 차원에서 길 가던 개신교 신자와 윤식명(尹植明) 목사와 전도사 원용혁(元容赫) 등을 폭행하여 서귀포 고이즈미(小泉淸身) 병원에 입원하게 하였다.

이에 일본경찰은 목포에 증원을 요구하는 한편, 도내 각처에서 모여온 진압대에 의해 서호리에서 대치하던 박명수 부대는 퇴각하고 결국 38명의 봉기 주동자 전부가 체포당하였다.

이러한 항쟁으로 검거된 총인원은 66명으로 대부분 불교도와 선교도들로서, 의병 항쟁 이후 3ㆍ1 운동 이전에 국내에 일어난 여러 무력 투쟁 중 대규모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민족 종교인 선도교를 사교 집단으로 매도 격하시켰으며 이 운동을 가혹하게 대처해 나갔다. 관련자 66명을 3차에 걸쳐서 목포검사국으로 송치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光州支法) 목포지청에서 열려 31명에 대하여서는 실형이 언도되고 2명은 재판 직전에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또 15명에게는 벌금형이 내려지고, 나머지 18명은 불기소 처분을 선고하여 석방되었다.


양남구는 중군대장으로 참여하여 1918년 10월 5일 중문면 주민들을 선동하여 일본 경찰 축출시위를 벌이고 중문 주재소를 습격한 일로 체포되었다.

제주에서 고문을 받고 1919년 2월 5일에 소요 및 보안법 위반이라 하여 징역 4년이 선고되어 대전(大田)형무소와 목포형무소에서 2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일본 대정천황(大正天皇)의 득남(得男)으로 인한 특사령(特赦令)에 의해 1920년 8월 7일 징역 2년으로 감형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출옥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고 또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김찬흡 북제주문화원 원장, http://culture.jeju.go.kr/ 제주특별자치도 게시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작성 13070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