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시 용담동 먹돌2로 유적'..용담2동 월성마을선사무덤유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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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시 용담동 먹돌2로 유적'..용담2동 월성마을선사무덤유적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2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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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수혈주거지는 모두 기둥 2개를 가운데 세운 형태의 송국리형 주거지에 해당한다

용담2동 월성마을선사무덤유적터

 

제주도기념물 제40호(1990년 05월 30일 지정)
위치 ; 용담2동 741-1번지(월성로2길8-6호 남쪽)
시대 ; 탐라시대(BC200~100년경)
유형 ; 선사시대 분묘

용담2동_월성마을무덤유적
용담2동_월성마을분묘(디제)

 

용담동 일대는 선사시대-역사시대에 걸쳐 장기간 동안 유적이 형성된 곳이다. 이 유적은 철기시대의 적석석곽묘이다.

1984년에 용담2동 먹돌세기 월성마을의 주택공사 현장에서 합구식 독무덤 1기가 발견됨으로써 발굴을 행한 유적이다.

BC200~100년경 형성된,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수혈 움집이 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현재 알려진 국내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인 삼양동 유적보다 100여 년 앞선 것이다.


발굴조사면적은 20m×20m이며 발굴층의 깊이는 70㎝이고 문화층은 두 개의 층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20~30㎝ 두께의 경작 표토층과 20~30㎝ 두께의 무유물층 아래에 있는 유물 포함층에서 적석 유구 묘역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묘역의 범위는 동서 길이 18m, 남북 길이 8m이다.


이 유적의 축조연대는 묘역 가운데 석렬을 경계로 시기를 달리한다. 남쪽 묘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류는 제주도 구멍무늬토기 말기단계로 삼뢰 조개무지, 북촌리 바위그늘주거지 4층, 곽지 조개무지 2지구 최하층에서 출토된 토기와 동일하다. 기원 직전까지 사용한 토기로 파악된다. 북쪽 묘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모두 제주 주호시대에 해당한다.


묘역은 한가운데에 있는 동서 방향의 긴 석렬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 두 구역으로 나뉜다. 확인된 유적은 남쪽 구역에서 고인돌 하부 구조처럼 보이는 석곽묘 3기, 북쪽 구역에서 옹관 6기와 폭이 좁은 장방형 석곽묘 1기이다.

남쪽 구역의 돌덧널무덤 중 가장 큰 것은 긴 축이 동서방향으로 길이 260㎝, 폭 140㎝, 깊이 50㎝이다. 중앙 바닥면에 시신을 안치하고 돌을 쌓은 다음 그 위를 6개의 판석으로 덮었다. 뚜껑돌 자체가 석곽을 완전히 덮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작은 석곽묘 2기는 앞서의 석곽묘 서쪽으로 잇대어 축조되었다. 직립구연토기, 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토기, 흑갈색 또는 흑색의 간토기 등의 출토유물은 모두 석곽의 암석틀과 바닥면에서 확인되었다.


남쪽 묘역의 축조연대는 말기형 공렬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기원전 3세기 에서 1세기경이고 북쪽 묘역은 황해도 덧널무덤[土壙木槨墓]에서 출토되는 한식철기 계통인 장검과 일본 야요이시대 중기에 속하는 초기 형태의 철촉의 사용연대와 비교하여 기원 1세기 말에서 2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북쪽 구역은 광범위한 적석군을 이루고 있다. 남쪽 묘역과 마찬가지로 할석을 깔았고, 대체로 동서로 긴 장방형을 하고 있다. 남아 있는 묘역은 동서 길이 15.6m, 남북 너비 3.6~5m, 총 면적 약 60㎡로, 남쪽 묘역의 2배 가까이 된다. 적갈색토기 독무덤은 일정한 원칙없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으며, 돌덧널무덤 1기는 약간 동쪽에 치우쳐 있다.


이 묘역에는 7기의 무덤이 있다. 장방형의 공간을 돌로 둘러싸서 만든 일종의 석곽묘 1기와 곽지리식 적갈색토기 항아리를 이용한 독무덤 6기가 확인되었다. 그 밖에 원래 석곽묘일 가능성이 있는 유구가 있으나 윤곽의 확인이 어려운 예도 있다.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는 전체 묘역 중 다소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그 주위로 일정한 형식 없이 독무덤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북쪽 묘역은 남쪽 묘역보다 20㎝ 이상 더 높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부로 가해진 후대의 교란 정도가 심하였다. 이에 석곽묘의 구조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이 1m 정도에 깊숙이 터를 잡은 합구식 독무덤 1기를 제외하면 완형을 유지한 독무덤은 없었다.


석곽묘는 길이 230cm, 폭 80cm의 세장한 장방형의 형태를 가진 것으로 상부의 대부분은 깎여나갔다. 장축은 동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死者의 침향은 장검과 단검의 칼끝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 동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구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토기로서 곽지 조개무지 2지구 2층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항아리형 적갈색 토기뿐이다. 철기유물로서는 장검, 단검, 모, 촉이 발견되는데, 석곽묘 내부 뿐만 아니라 독무덤 주변의 적석 틈에서도 출토된다.

옹관은 모두 작은 할석으로 돌려 있으면서 두 개의 크고 작은 적갈색토기 항아리가 맞물린 합구식, 한 개의 항아리를 비스듬히 또는 수직으로 묻은 단옹식이 있다.


남쪽 묘역에서 나온 공렬 토기 복합군은 제주도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공렬토기가 남한 지방에서 일대 유행한 토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용담동의 토기는 제주도에 이 문화가 유입된 직후의 토기 문화가 아니라 이미 한 단계 지난 토기로, 나름대로 토착화 과정을 거친 토기이다. 한편, 남한 지방의 공렬토기가 바로 유입된 단계의 제주도 유적으로는 대정읍 상모리 유적의 예가 있다.


토착화된 토기와 전혀 다른 형식의 곽지리식 토기가 전에 없던 독무덤이라는 점에서 묘제 및 철기 문화와 함께 새롭게 등장한 점은 총체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 변화는 새로운 주민의 이주이거나 공렬토기를 사용한 남쪽 묘역 집단의 후손들이 일정 기간 새로운 외부 문화를 받아 들여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입증하려면 외부 문화의 유입 및 자체 발전의 과정을 설명해 주는 자료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제주도에서 그런 자료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반대로 전자의 경우를 입증하려면 새로운 주민이 이주해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곽지리식 토기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현재로서는 분명한 자료가 없다.


유물은 묘역의 남쪽과 북쪽 구역에서 모두 출토되었다. 남쪽 구역에서는 공렬 토기·구순부각목토기·적색과 흑색의 마연 토기가 출토되었다. 북쪽 구역에서는 곽지리식 토기와 함께 다량의 철제 유물과 유리 구슬 제품이 출토되었다. 이 두 구역의 유물이 뚜렷한 시기 차를 보이는 것으로 볼 때, 남쪽 구역이 먼저 축조된 후에 북쪽 구역이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담동 선사 무덤 유적은 탐라 소국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세력 집단의 출현 근거로 볼 수 있다. 용담동 선사 무덤 유적은 제주시 최초로 확인된 유력 세력의 집단묘로 파악된다. 북쪽 묘역의 주인공들은 남쪽 묘역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토기와 철기 및 무덤 양식을 소유한 주민 집단으로 판단된다. 그 변화의 범위와 정도로 미루어 볼 때, 새로운 계통의 주민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 단계의 주민과 동일 계통이면서 외부 문화를 새롭게 받아들인 주민 집단의 무덤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이는 전대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 석렬을 정연하게 두른 점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무덤군은 용담동 일대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선주민사회의 이해관계와 사회변천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구멍무늬토기와 골아가리 토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유적은 기원전 200년경 만들어져 기원전후까지 이어진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유적 인근에 독무덤, 돌덧널무덤 유적과 고인돌이 모여 있어 대규모 마을 유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범위는 서쪽으로 용담동 무덤유적, 남동으로 한천변 오라동 제주시 종합경기장 일대, 북으로 고인돌 구역까지 약 5만평 이상이 된다.

이 무덤군이 시사하는 바는 구멍무늬 토기 사용집단의 무덤이 있는 곳에 새로운 철기소유자 집단이 전 시기의 묘역과 일단의 석렬로서 경계를 구획한 다음, 그에 잇대어 공동묘지를 조관했다는 사실이다.

용담동 무덤 유적에서 발굴된 철제무기나 동굴 바위그늘 집자리, 조개무지, 적갈색토기, 석기 등이 용수와 식량 획득이 유리한 해안지방을 따라 제주도내 많은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확인된 곳은 50여 지역이 넘는다.

따라서 이 시대에 와서 제주도 인구가 급속히 팽창되어 많은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철검 등의 다량의 철제 부장품으로 판단할 때 당시 용담동 일대에 강력한 지배층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 홈피, www.jeju.go.kr/제주의문화, 민족문화대백과,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두산백과)


현재 이곳의 상태는 구획을 정하여 울타리를 치고 보존하고 있는데 띠를 비롯한 풀이 곱게 자라고 있으며, 50cm 정도 크기의 돌들 십수개가 열을 지어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한편, 2003년 12월 이 무덤유적에서 동쪽으로 100m내에 위치한 용담2동 2731-2번지 자동차수리소 신축부지 현장을 발굴한 결과 일명 '제주시 용담동 먹돌2로 유적'으로 불리는 300평 면적에서 원형수혈 주거지 5기, 수혈유구 11기, 소토유구 1기, 주혈 다수, 민묘 2기 등이 확인됐다.

발굴단은 "원형수혈주거지는 모두 기둥 2개를 가운데 세운 형태의 송국리형 주거지에 해당한다"며 "이는 용담동 일대가 송국리형 주거지를 바탕으로 한 마을의 중심부인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주거지는 대체로 직경 4m 내외로 삼양동 선사유적지에서 확인된 주거지와 규모면에서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대략 4기의 주거지가 일정한 중앙공간을 두고 축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도 토기 경우 삼양동 유적에서 출토되는 삼양동식토기에 선행하는 형식을 띠고 있으며, 석기류는 숫돌, 공기석기 뿐이지만 토제방추차가 다수 출토됐다.

특히 이번 발굴은 삼양동 선사유적(사적 416호)에서만 확인됐던 송국리형 문화가 용담동 일대에도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제주투데이 20031213)
《작성 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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