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 활동근거지.. 조천리 조천지서 성담
상태바
[향토문화]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 활동근거지.. 조천리 조천지서 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24 07: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시 제1구 경찰서장 문용채와 수사과장 성범용, 조천지서 주임 조한용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

조천리 조천지서성담
 

위치 ; 조천읍 조천리 1218-2.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관청(방어유적)

조천리_조천지서성벽 총안

 

조천리_조천지서뒤

 


1945년 10월 국립경찰대학 창립과 더불어 제8관구 22구 경찰서 조천지서로 발족했다. 4・3 당시 경찰 및 응원대의 활동근거지가 됐으며 피의자에 대한 취조 및 학살이 자행된 곳이기도 하다.

1948년 3월6일 조천지서에서는 김용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사건 발생 6일후인 3월 12일에야 제주신보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1區署 조천지서에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유치중이던 동리 청년이 유치장내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 사망자는 조천면 조천리 하동에 주소를 둔 김용철이란 청년인데, 작년 3·1사건의 피의자로서 경찰에서 수배중이었는데, 지난 3월 4일 미명 동면 대흘리 2구에서 피신중이던 것이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중이었던 바, 6일에 이르러 돌연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 당국에서는 이 보고를 접하여 7일 채용병 검찰관 지휘하에 의사 장시영씨와 관계관 등이 급거 현지에 출장하였는데 경찰감찰부청장 박근용씨와 CIC 美人 도 동행 입회하에 사체를 해부 검시하는 한편 사인에 대하여 면밀한 현장조사를 마치고 귀읍(歸邑)하였다는 바, 앞으로도 의사의 감정서에 의하여 조사를 계속하리라 하며 CIC에서도 검찰당국과 병행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 보도 이전에 벌써 조천 지역에서는 김용철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여기고 학생은 물론 주민들 민심이 분노로 들끓었다. 경찰에서는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둘러댔으나 시신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어서 설득력이 없었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철저한 조사를 군정당국에 요구했다.


경찰측에서는 이북 출신인 당시 제주도청 보건후생국장 송환영 의사를 검시의사로 적극 추천하였다. 당시 제1구 경찰서장 문용채와 수사과장 성범용, 조천지서 주임 조한용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제주 출신인 장시영씨를 검시의사로 선택하였다.

부검은 경찰측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마쳐졌다가 미군 고문관의 재부검 지시에 의하여 2차 부검을 했는데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인 사인'으로 밝혀졌다. 의사 장시영은 경찰의 계속되는 회유를 뿌리치고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이 감정서에 따라 조천지서에 재직했던 조한용 지서장 등 5명의 경찰관 모두에게 3∼5년의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고문 현장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쳤다고 한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149~150쪽)


김용철의 장례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치러졌다. 동생 김용선(남, 2002년 63세)에 의하면 수백 개의 만장으로 추도 물결을 이루었다고 회고했다. 4.3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쯤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결과적으로 도피입산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고, 도민들은 경찰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제주4·3유적Ⅰ 392∼394쪽)


1948년 4월3일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으나 사전에 발견하여 선제사격을 함으로써 피해가 없었다. 이에 대해 당시 조천지서에 근무했던 정도일은 "어떤 순경이 우연히 밖을 내다보면서 은밀히 지서로 접근하는 무리를 발견해 한 발의 공포탄을 쏘았는데 모두 도망갔는지 그것으로 상황이 끝났다." 고 증언했다. 무장대 측 자료는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 포위전은 완전히 성공했으나 사전 발각으로 퇴각"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http://blog.daum.net/didaudtns/5728664) 그러나 이튿날 무장대가 재습격해서 교전 중 무장대원 1명이 사망하고 경찰관 2명(양창국, 유순경)이 부상당했다.


현재는 건물이 개축되어 옛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건물 뒤편에는 당시 지서 외곽을 축성한 성담과 총안(銃眼) 2개가 그대로 남아 있다. 4・3 발발 이후 다급해진 지서에서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한 것이다.(제주4・3유적Ⅰ 340쪽)


조천지서 경찰은 1949년 1월13일, 2월1일 조천리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중산간 및 해변 각지의 도피자 가족 90명을 지서 앞 밭에서 총살하였다.


1950년 8월에는 예비검속으로 이곳에 붙잡혀온 사람들을 배에 싣고 바다로 3시간쯤 나가서 발에 돌을 매달고 빠뜨려 죽였다는 증언이 있다.(헤드라인제주 130328)
《작성 13072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