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瀛州十景의 하나로 꼽는 山浦釣魚.. 건입동 금산물(용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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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瀛州十景의 하나로 꼽는 山浦釣魚.. 건입동 금산물(용천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2.2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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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대표적인 용천수여서 지장샘, 산짓물, 광대물 등을 모두 합하여 금산물로 부른다.

건입동 금산물(용천수)

 

위치 ; 건입동 1185번지. 금산수원지생태공원 안 남쪽.
유형 ; 수리시설(용천수)
시대 ; 미상(조선시대 추정)

금산유허비
금산물

 


금산물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용천수여서 지장샘, 산짓물, 광대물 등을 모두 합하여 금산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산물은 『제주의 물, 용천수』에 따르면 용암류경계형이며 1일 용출량이 평균 19,924㎥, 최대 21,772㎥이다.


옛 제주성 북성 문턱, 바다를 향해 병풍을 친 듯이 우뚝 솟은 금산(禁山)은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입산이 금지됐던 지역이다.

조선 성종16년(1485년)에 반포된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재식(栽植)조에는 ‘도성 안팎에서는 산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부근 주민들에게 나눠줘 벌목과 채석을 금지하고, 감역관(監役官)과 산지기를 두어 간수(看守)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금산을 정하여 벌목과 방화를 금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소나무숲을 보호하기 위해 松木禁養이란 법령이 있었다. 禁養은 산림보호에 관한 용어인데 禁은 지정된 산림에 수목의 벌채나 분묘 설치, 농지 개간 등을 금하는 지역을 말하고 養은 수목 특히 소나무의 재배와 육성을 말한다. 지금은‘錦山’으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는 ‘禁山’이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경우 이러한 금산이 몇 군데나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전령이라는 문서가 남아 있어 건입동 지경의 금산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서의 내용은 〈傳令(영을 전함) 旗牌高世興 健入境禁松監官差定不輕隨行者(기패 고세흥을 시켜 명을 전하는 바 건입지경 금송감관은 맡은 일을 수행함에 가벼이 말라 또는 기패 고세흥에게 건입지경 금송감관 일을 맡기니 수행함에 가벼이 말라) 甲子正月 日(官印) 大將(手決)〉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종원년(1864 甲子) 1월에 작성된 문서이다.

기패는 조선한국이나 중국에서 깃발이나 패를 가지고 명령을 전하는 전령이다.


금산수원 개발과 함께 금산물·광대물은 취수원으로 쓰이고 있고, 당시 제주시청에서 수질 보호를 위하여 주민들에게 이곳에서 빨래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한창 수원지 주변을 개발할 땐 포크레인으로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펑펑 쏟아져서 인부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한다.

금산의 풍치와 어우러진 이곳은 수원 개발과 매립 등으로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사라졌다. 생태공원 안 북쪽에 금산유허비(禁山遺墟碑)가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곳 禁山은 濟州 城內와 山地浦를 내려다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많은 문화명소가 있던 유서깊은 현장이다.

濟州城 北城 문턱에 막바로 바다에 낭떨어지를 이루며 우뚝 뻗은 이 언덕에는 제주 특유의 난대림이 우거져 오랫 동안 입산이 통제되면서 禁山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또 고종14년(1877)에는 이곳에 길이 뚫리면서 ‘공덕동산’이란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 금산 일대에는 望哭壇, 酺祭단壇, 萬壽寺, 福神彌勒(東資福神像), 海山臺, 決勝亭, 拱辰亭, 北城 등이 있었으며, 그 기슭에는 泳恩亭, 北水閣, 天一亭, 竹西樓, 무지개다리(虹霓橋), 김만덕의 객주집 터 등이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면 온 성내 욕객이 모이던 금산물(禁山泉)을 비롯하여 노리물(鹿泉), 지장깍물, 광대못(廣大泉), 山地川 하구가 있었으며 고대 耽羅國의 첫 교통항이었던 健入浦가 마주 퍼져 있었다.


이처럼 이 일대는 금산과 더불어 샘, 연못, 하천,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수려한 산천 풍경을 이뤘으며 白鳥를 비롯하여 많은 候鳥들이 날아들었고 태공들은 낚싯대를 들여놓고 시간 가는 줄을 잊었으며 문인 선비들은 詩會와 주연을 베풀어 회포를 풀던 평화스런 정경을 볼 수 있었다.

특히 瀛州十景의 하나로 꼽는 山浦釣魚는 바로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제주 앞바다의 수백척 낚시배가 등불로 不夜城을 이룬 야경이었다.

이 일대는 1931년부터 시작된 제2차 濟州港 축항공사로 매립되기 시작하여 1955년에는 마침내 금산물 원천마저 매립되어 지금은 금산수원지로 변하고 말았다. 참으로 아까운 제주의 명소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에 우리 제주시 건입동 有志들이 뜻을 모아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유서깊은 문화의 현장을 길이 되새길 수 있도록 이곳에 碑를 세운다.


濟州島史硏究家 洪淳晩 지음, 前面 글 樂山 金泰俊 씀, 後面 글 한곬 玄昞璨 씀
1993년 12월 일
濟州市健入洞 洞民 一同 세움
本 碑文은 壇上 遺墟碑 後面에 刻書〉


조선 명종21년(1566년) 제주성이 확장된 것은 이곳의 금산물·광대물·지장깍물을 성안의 급수로 삼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제민일보 040620)
《작성 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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