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60여 년 전 일본군 주력부대 주요 진지.. 봉개동 고냉이술갱도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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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60여 년 전 일본군 주력부대 주요 진지.. 봉개동 고냉이술갱도진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6.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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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냉이술은 큰칡오름(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대형 분화구인 곶자왈 지역

봉개동 고냉이술갱도진지

 

위치 ; 봉개동 165번지. 명도암마을 북동쪽 큰칠오름 북동쪽에 있는 고냉이술 남쪽 동서로 길쭉하고 큰 밭과 숲 지대가 만나는 지점
유형 ; 방어유적(갱도진지)
시대 ; 일제강점기

봉개동_고냉이술갱도진지 입구

 

봉개동_고냉이술갱도진지도면(한라일보)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 들어서면 일본군은 속속 제주로 진주하였다. 그 해 초 수천 명에 불과하던 일본군은 4월이 되면서 주력부대가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시작 8월까지 7만5천여 병력이 주둔하였다.

당시 제주읍 일대도 일본군 96사단 예하의 주력부대가 동․서부로 나뉘어 주둔, 일 본토 사수를 위한 최후의 일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일본군 군사지도인 '제58군배비개견도' 등에는 동부지역은 현재의 제주시 봉개동 일대가, 서부지역은 오등동 민오름 일대가 주저항진지로 표시돼 있다.


제주시 봉개동 일대에는 어떤 부대가 주둔했을까. 바로 일본군 96사단 예하의 293연대본부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현재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마을은 60여 년 전 일본군 주력부대의 주요 진지로 요새화됐다.

명도암마을뿐 아니라 주변 오름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대규모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명도암마을 정류장 뒤 경작지에 일본군 연대본부가 자리하고 있었고 인근에는 중대본부도 있었다. 일대가 일본군 연대병력 주둔지로서 집중적으로 진지구축이 이뤄졌다.


"연대본부는 돌담을 둘러서 초집(함바 형태)으로 만들었는데 일본군들은 2년 정도 주둔한 걸로 기억됩니다. 연대장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계급은 대좌로 차량 등이 있었죠. 당시 일본군 99식 소총과 대포를 싣는 구루마 등이 많이 있었던 걸로 기억되지만 다른 무기들은 보지를 못한 것 같아요."(봉개동 1937년생 김순식 증언)


명도암에 연대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 명도암오름(안세미․밧세미오름)과 칠오름, 열안지오름, 노리오름 등에 굴(갱도)를 팠다. 고냉이술은 큰칡오름(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대형 분화구인 곶자왈 지역이다.

지도에서는 산 표시가 되어 있다. 고냉이술의 남쪽에는 길고 넓은 목초지인데 서쪽에 있는 입구에서 300m 정도 동쪽으로 가서 곶자왈 지역과 만나는 지점에 비교적 입구가 크게 보이는 갱도진지가 남아 있다.


고냉이술에 있는 갱도는 길이가 70여m 정도 규모로 구축됐다.(도면 참조) 전체적으로는 디귿자형 구조를 보여준다. 이 갱도는 진입이 가능한 갱도입구의 바위가 일부 떨어져나가면서 폭과 높이가 넓어진 상태다.

반면에 또 다른 입구는 바위와 잡석들로 막혀있다. 진입부의 폭과 높이는 각각 230cm, 200cm 안팎이며, 가운데 주통로는 3m에서 더 넓은 곳은 4.5m에 이르는 곳도 있다. 이 갱도는 무너지는 등으로 해서 현재 남아있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내부에 크고 작은 방 3곳과 통로 2곳이 만들어져 있다.

벽면에는 곡괭이 자국이 보인다. 내부의 방은 토사 등이 흘러들어 천장이 낮아져 있지만 비교적 널찍한 공간을 하고 있다.

한라일보(071213) 도면에는 입구가 둘 표시되어 있지만 속에 들어가 보니 다른 입구는 함몰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냉이술의 갱도는 짜임새 있는 구조와 규모로 볼 때 단순한 병력 주둔용이 아니라 이 일대 일본군 갱도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작성 1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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