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라의 정기 서린 넓은 들녘에'..하도리 하도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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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한라의 정기 서린 넓은 들녘에'..하도리 하도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0.3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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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리 하도초등학교

 

위치 ; 구좌읍 하도리 2315번지(구좌읍 일주동로 3378)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하도리_하도초등학교
하도리_하도초설립강공칠기념비


하도리에서 전해오는 바로는 1880년 경 세화리 출신 고재환(高在桓)이 글동에서 전통 방식의 한문서당을 운영하였다고 하며, 1930년 이후에는 서동 부원홍, 김서구 등이 자기 집에서 소규모 서당을 운영했으며, 1940년대 초반에는 면수동에서 윤희순이, 서문동과 창흥동에서는 상도리 출신 정모씨가 서당을 운영하였으나 모두 영세한 시설이었고 교육 내용도 초보적인 수준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의 태동은 1919년 2월 10일 굴동 홍성훈 집터 개인집에서 사립하도개성의숙이 개설되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구좌면장이었던 강공칠은 1921년 4월 5일 4년제의 사립하도보통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고 초대교장을 겸임하였다.

사립학교로서는 제주도에서 제1호라고 한다. 학교 교문 옆에 세워진 비석에는 〈元私立下道普通學校設立者 故康共七氏記念碑 排除萬難 剏設斯學 孜孜營營 置於磐石〉(원사립하도보통학교설립자고강공칠씨기념비 모든 어려움을 배제하여 이 학교를 창설하고 힘써 경영하여 반석 위에 올려 놓다.〉라고 새겨져 있다.

사립하도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선 학교설립기금으로 일만원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당시에 일만원은 대단히 큰 금액이었으며 하도리민들이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설립기금 조성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추진위원회 역원들이 각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모금을 권유했으며 현금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임시 빌렸다가 그 이자가 누적되어 나중에는 마소나 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특히 여성으로서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거액을 기부한 분들이 있었는데 절부 부씨(310원), 절부 오씨(320원), 절부 홍씨(280원) 등이다. 이와 같이 하도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설립기금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1930년부터 10여 년 동안은 하도리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수입이 좋았으므로 주택개량이나 마을안길 조성, 학교 지원이 이루어졌다고도 한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1926년 4월 1일 사립하도보통학교는 2년제의 보습과 증설을 인가받았고, 1929년 4월 1일 4년의 보통학교와 보습과 2년에서 6년제 보통학교로 승격하였다. 1929년 5월 30일 사립하도보통학교는 굴동에서 현위치로 이설하였다.

1938년 4월 1일 조선교육령 개정에 의해 사립하도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4년 4월 1일 하도공립국민학교로 개편되었다. 심상소학교에서 국민학교로 바꾸면서 사립이 공립으로 전환되었다.(하도향토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하도초등학교 누리집)

1947년 3·1절 기념행사가 구좌읍에서는 세화리와 하도리의 경계 지점인 연두망에서 열렸는데 하도리에서는 하도교에서 집회를 가졌고 마을별로 대표 몇 명만 세화리로 갔다.
1948년 10월 27일에는 하도교 강사였던 부두영(夫斗榮)이 무장대에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카페〈제주큰동산〉)

1949년 9월 29일 4.3사건으로 인한 무장대의 방화로 하도교에서 펴낸 자료에는 7개 교실 중 6개 교실이 소실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당시 교사였던 김석만 등의 증언에 따르면 본관 8개 교실 중 6개 교실이 소실되었다.

카페〈제주큰동산〉에 따르면 4·3사건 당시 하도교 교사였던 김석만과 하도리 주민 정흥빈은 1949년 9월 29일 21시 경에 무장대가 침입하여 학교를 불질렀는데 5,6학년이 사용하던 동쪽 별관 2개 교실은 방화되지 않았으며, 당시 졸업대장은 땅 속에 묻어 보존될 수 있었으나 나머지 서류와 20여 명으로 구성되어 수준높은 활동을 하던 교악대의 악기류 등은 전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교사 중에는 서청회원 2명이 있었는데 학교내에서 사상적인 대립은 없었지만 마을이 주목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50년 5월 31일 하도공립국민학교는 하도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1년 3월 10일에는 하도국민학교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96년 3월 1일하도초등학교 및 하도초등학교병설유치원으로 이름을 고쳤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립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노동야학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키웠던 제주해녀항일투쟁의 산실이다.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오문규, 김순종,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선생들이 담당했다.

제주해녀항일투항쟁이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연평리(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되면서 2년여 넘게(1931~1932년)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신진 청년교사들의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도리의 해녀들은 이곳에서 「노동독본」「농민독본」등을 활용, 문맹자를 위한 기초교육, 신지식교육 등과 함께 은밀히 민족자주의식을 길렀다.

하도리 출신의 고차동(1915년~) 등 제주해녀항일투쟁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선생님으로부터 민족의식 교육을 공부한 우리 하도리 해녀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일본 어업조합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언니들(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김계석 등 당시 해녀항쟁 주도자)과 함께 일본당국에 투쟁할 계획을 짜는 등 항일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당시 해녀들은 야학공부를 통해서 근대교육을 받는 한편 민족의식을 키웠던 것이다. 제주해녀항일투쟁의 효시가 된 하도리는 현재 항쟁의 전황을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 없다. 하도리 야학의 산실인 옛 하도초등학교는 학교 이전으로 없어졌고, 야학 당시 활동 연대나 간략한 내용마저도 학교연혁에서 빠져 있다.(제민일보 060724)

교가(작사 임홍선/작곡 이동수)


한라의 정기 서린 넓은 들녘에
푸른 꿈 우거진 배움의 터전
월계나무 늘 푸른 높은 기상에
영광되게 자라나는 하도교 어린이
슬기롭게 배우고 튼튼하게 자라
온누리에 빛내자 우리 하도교.

2009.01.16. 제9회 전국 아름다운 학교 최우수상 수상
2012.11.15. 학교도서관 발표대회 금상 수상
2013.01.30. 학교평가 최우수학교 선정
2013.12.11. 제3회 독서교육대상 교육부 장관상 수상
2014.02.14. 제91회 졸업식(남 4명, 여 10명, 계 14명 졸업생 총계 4,933명) (하도초등학교 누리집)
《작성 141219, 보완 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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