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백중의 넋을 기리는 제사..유수암리 장전공동목장백중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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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백중의 넋을 기리는 제사..유수암리 장전공동목장백중제단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2.04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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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테우리)이었던 백중..백중제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의 뺄 수 없는 귀중한 제사가 되었다.

유수암리 장전공동목장백중제단

 

위치 ;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136-3번지. 궷물오름 등반로 입구.
시대 : 미상(일제강점기 추정)
유형 ; 민속신앙, 목축유적

유수암리_장전공동목장백중제(제민일보)

 

유수암리_장전공동목장백중제단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시대에 마련된 10소장을 세분하여 마을공동목장으로 전환하였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마소나 개인의 마소를 무료로 방목할 수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마을별로 땅을 구입하거나 국가로부터 임차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유료방목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는 점이 달라진 것이다.


1934년에 공포된 제주도사(濟州島司)의 공동목장정비시행령에 따라 조합을 만들게 되었다. 장전리 공동목장은 유수암리 지경에 있다. 원래는 5소장 지역이었던 곳이다. 궷물오름 일대의 많은 땅을 장전리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경은 유수암리 지경이지만 이 일대를 중심으로 공동목장을 설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전리공동목장조합은 조합원 118명이 궷물오름과 잿밭 일대에 개인출연과 매입을 통하여 84만평의 토지를 확보하고 1935년 7월 1일 결성하였다. 초대 조합장은 강항영이었다.


궷물에서 항상 물이 흘러나오므로 물은 충분하였으나 물을 모으지 않으면 상시 공급이 어려웠으므로 조합원들은 바닷가의 모래와 자갈을 등짐으로 운반하여 시멘트로 공동목장에 필수적인 우마급수장(물통)을 만듦으로써 목장에 필요한 물을 쉽게 공급할 수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는 昭和十二年(1937)八月竣工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으나 현대(2010년 전후)에 큰 바위를 가지고 조경을 하면서 가려져 버렸다.
1948년에는 4·3사건으로 인하여 목장운영이 중단되었다가 1955년 재개하였다.


방목한 마소의 관리는 3명의 목감에게 맡기고, 목감은 목장 안에 상주하였다. 조합원들이 보리를 갹출하여 품삯으로 지급하였으며, 남은 것은 팔아서 주변 토지를 추가매입하여 상잣과 하잣을 경계로 200정보까지 확보하였다.


1962년부터는 정부가 축산업의 현대화를 목표로 초지조성사업을 벌였는데 제주도가 그 최적지로 선정되어 1967년부터 1970년대말까지 1,000㏊의 초지를 조성하여 전국 최대의 성과를 기록하였다. 장전공동목장에도 1968년부터는 방목지에 인공적으로 초지를 조성하였다.

1970년 경부터는 연차적으로 녹고뫼 북쪽에 비바람으로부터 우마가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삼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하였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는 목장을 개인에게 임대하여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목장을 개간하여 감자 등을 재배하도록 하였다. 사실상 목축업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월읍 유수암리 136-3번지. 궷물오름 등반로 입구에는 백중제단이 있다. 궷물 바로 옆에 있는 이곳 백중제단은 목동(테우리)이었던 백중의 넋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아래쪽에는 암쇠물이라고 불리는 우마급수용 연못이 있다.


해마다 음력 7월 14일이 되면 제주도의 여러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백중제"라는 목축을 위한 제사를 지냈었다. 과거에는 공동목장에서 방목 우마를 관리했던 목감이 우마의 번성을 축원하여 궷물오름 정상이나 테우리 막사에서 백중제를 지내왔다. 오늘날에는 조합이 주관이 되어 유교식 제사로 백중제를 행하고 있다.


제단은 장방형의 평평한 돌을 상석(床石)으로 삼고 상석의 남쪽에는 돌담을 둘렀다. 궷물이 있는 곳보다 5,6m 정도 높직한 곳이어서 현무암 자연석을 이용하여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제장의 넓이는 5평 정도이다. 현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제를 지낼 때에는 제단을 목장에서 자라는 새(띠)로 덮은 다음, 그 위에 돼지머리와 마르지 않은 옥돔, 삶지 않은 돼지살코기, 쌀밥, 조팝, 마른 명태, 과일, 술을 진설한다. 이후 2명의 집사가 먼저 백중신을 모신 제단을 향해 절을 하고 3명의 헌관(초헌관, 아헌관, 종헌관)들이 순서대로 제단에 절한 후 초헌관이 축문을 낭독한다.


백중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백중 전설》


옛날 차귓뱅뒤 백중이라는 목동은 매일같이 바닷가에서 마소를 먹이고 있었다. 하루를 바다에서 보내는 백중은 어느날 평소와 다름없이 마소를 먹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을 탄 옥황상제가 위엄있는 얼굴을 하고 내려왔다.

깜짝 놀란 백중은 큰 소리가 나는 곳을 웬일인가 싶어 바위 뒤에서 숨죽여 보고 있자니까 옥황상제는 큰 소리로 바다를 향하여 “거북아!"하고 하늘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불렀답니다. 잠시 후 아주 큰 거북이 바다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엄청난 거북이 나타나자 깜짝 놀란 백중은 호기심이 생겨 좀 더 가까이에서 숨어서 엿듣기로 하였다.


"거북아, 오늘밤에 석 자 다섯 치의 비를 내리게 하고 바람과 비가 아주 많게 하라." 이 말을 남기고 옥황상제는 유유히 하늘 위로 올라가 버렸다. 그런데, 백중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석 자 다섯 치의 비와 폭풍이 내리치면 홍수가 날 것은 물론이고 가축이 모두 죽어버리고 곡식이 모두 망가져 농사를 망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옥황상제가 하늘 위로 사라지자마자 그는 언덕위로 급히 올라가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거북을 불러내서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는 깜빡 잊어서 말을 잘못했다. 비는 다섯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지 않게 하라."

거북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저녁에 비는 백중의 말대로 다섯 치의 비만 내리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런데, 하늘에서 지켜본 옥황상제는 자신이 명령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화가 났다. 크게 노한 옥황상제는 차사에게 백중을 잡아오도록 하였는데, 백중은 옥황상제의 벌을 받느니 스스로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이러한 백중의 지혜와 용기 때문이었는지 그 해는 대풍작이었다. 농민들은 그 후로부터 백중의 지혜와 용기 덕분에 마을에 피해가 없고 풍작이 연이은 것에 대한 은혜를 감사히 여겨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이면 제사를 지내어 그의 혼을 위로하기로 하였다.

마침, 이 날(백중이 죽은 7월 14일)은 백중날이라 하여 물맞이와 해수욕을 하는 풍속이 생겨났고, 더불어 이 날에 물맞이나 해수욕을 하면 만병에 약이 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물을 맞거나 해수욕을 한다. 또, 이 날에는 백중의 덕분에 마늘 따위도 심으면 잘 되어서 백 가지에 벌어지는 등 풍작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이 "백중제"는 한 목동의 혼을 위로하기로 한데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오늘날 이 백중제는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의 뺄 수 없는 귀중한 제사가 되었다.
《작성 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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