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 첫 영세자이자 첫 순교자..함덕리 김기량펠릭스베드로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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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제주 첫 영세자이자 첫 순교자..함덕리 김기량펠릭스베드로 생가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1.29 2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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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순교로 가족들은 체포돼 순교하거나 모든 것을 잃고 흩어져 유랑하게 되었다

함덕리 김기량펠릭스베드로 생가터

 

위치 ; 조천읍 함덕리 207-1번지(조천읍 평사길 19)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민가

김기량_펠릭스생가(2006년_천주교주교회의_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함덕리_김기량펠릭스베드로생가터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함덕리 출신으로서 제주의 첫 영세자이며, 이 고장에서 처음으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한 제주지역의 첫 순교자이다.

제주도에 공식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례행위와 전교활동이 시작된 것은 1899년 5월 26일이었다. 그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고 순교한 사람이 바로 김기량이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金嗜良, Felix Petrus)는 1816년 제주목 함덕리의 비교적 윤택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총명한 두뇌와 강한 의지에 어느 정도의 학식도 갖추고 있어서 김선달(金先達)로 불리었다.

청년 김기량은 모든 일에 열성을 기울였고,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이웃의 신임을 얻었으며 배를 구입하여 선주로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이 방면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42세가 되던 1857년 2월, 김기량은 동료 4명과 함께 배에 약재와 그릇들을 싣고 무역차 정의현 서귀진을 거쳐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갑자기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동료들을 모두 잃고 배에 남은 약간의 양식으로 겨우 연명하면서 한 달 가까이 표류하던 중 해류에 밀려 중국의 광동 해역까지 흘러갔을 때, 다행히 바다를 지나가던 영국 배에 발견되어 구조를 받는다.

이렇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그는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에서 80여일 머무르는 동안 그는 루세이(Rousseille)신부의 지도 아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웠다.

이 바울리노는 1854년 최양업(토마) 신부에게 발탁되어 페낭(Fenang) 신학교에 유학 가서 사제 수업을 받던 신학생으로 건강이 나빠져서 1857년 초에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와서 휴양을 하던 참이었다.

이 바울리노 학생에게 교리를 배운 김기량은 1857년 5월 31일에 루세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제주 출신의 첫 번째 신자로 탄생하였다.

그 후 김기량은 상해에 가서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 받았다. 중국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학식을 갖추고 있던 그는 글자(漢字)를 써서 자신의 상황을 중국인들에게 전하여 풀려나게 되었으며, 1858년 1월에 우리 나라 국경인 의주부(義州府)에 도착하여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감영, 강진 등에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그는 이 바울리노가 전해 준 서한과 안내 정보를 가지고 많은 어려움과 고생을 겪으며 교우촌을 찾아갔다. 교우촌에 도달하여 최양업 신부와 페롱(Feron, 權)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때 최신부는 오두재(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 2리의 오도티)에, 페롱 신부는 이곳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산막골(모동면 신흥1리의 도리원)에 거처하고 있었다.

이 때 최양업 신부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성실함과 그의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보고는 그가 제주도의 훌륭한 사도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페롱 신부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 신부는 펠릭스 베드로에게 여러 서적과 성물들을 주면서 제주에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도록 격려했던 것이다.

최 신부는 김기량을 만난 뒤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그를 만나서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하심과 섭리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그는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를 하직하면서 자기가 제주도 고항으로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후 저에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최양업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8년 10월 4일자 서한)

김기량은 교우촌에 3개월 가량 머물면서 신심을 다지는 한편, 필요한 서적과 자료를 얻고 1858년 4월 조천포를 통해 제주로 귀환하였으니, 풍랑에 의한 표류로 떠나간 지 실로 1년 2개월만에 밟은 고향땅이었다.

고향에 도착한 그는 제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60년 경에는 집안식구를 중심으로 20명 가랑을 입교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배에서 일하던 선윈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예비신자가 되게 하였다.

워낙 복음의 불모지였던 고장에 구원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라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으나 그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복음전파에 매진함으로써 1866년 무렵에는 예비신자를 포함하여 40여명이 천주교에 입교하고 성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제 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는 김기량에게 선교사 1명을 제주에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병인박해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는 세례 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 신자들을 데리고 신부를 만나려 육지부로 왕래해야만 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김기량을 만난 인상을 기술한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루세이 신부 지도 아래 이 학생(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워 그 난파자(김기량)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다행히 금년에 조선에 들어와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나와 연락을 취할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 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베르뇌 주교의 1858년 8월 14일자 서한)

이러한 과정에서 김기량은 교리를 실천하는 데 열심이었고, 판공성사를 받기 위해 상경한 적도 있으며 교우촌을 찾아가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평소에 신앙에 관한 글을 지어 외움으로써 신심을 돋우기도 하였다. 그가 지은 가사 중에서 훗날의 증언을 통해 그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와 벗님네야 치명(致命)길로 횡행하세 어렵다 치명길이야 평생 소원 사주모(事主母)요 주야 앙망 천당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도(能到) 주대전 하옵소서.〉

이 천주가사에는 교우들을 벗님으로 표현하여 만민평등과 형제애를 드러내고 있으며 순교야말로 하느님을 최대한으로 섬기는 길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끝부분에 작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 게 특징이다. 따라서 이 가사는 교리를 전파하고 권장하는 목적 이외에도 그 자신의 순교 신심을 다지기 위하여 지어내고 외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865년, 김기량은 다시 한 번 폭퐁을 만나 일본 큐우슈우 해안에 표류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프티장 신부는 1864년 나가사피(長崎)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주교로 승품되어 일본 교구장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한창일 무렵, 김기량은 세례 받을 준비를 마친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가족들과 함께 거제도로 나갔으며,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통영에 나갔다가 그 곳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다른 교우 4명과 함께 1866년 9월에 통영 관아로 이송된 그는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성교를 밑는다"고 떳떳이 자백하였고, 옥중에 갇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렇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기량은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나는 치명하여 죽을 것이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의연히 권면하였다.

결국 관아에서는 장살형(杖殺刑)으로는 그들 5명의 목숨을 끊을 수 없음을 알고 교수형(絞首刑)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관헌들은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 것을 염려하였던지 가슴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이리하여 제주 출신의 첫 신자인 김기랑 펠릭스 베드로는 1867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교함으로써 그의 뜻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많은 자료들이 그의 순교 모습을 잘 전해 주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비를 장만하고자 박하유를 팔러 통영으로 갔다가 군난이 대단히 심한 때였으므로 '박하유는 천주학장이의 물건이다' 라고 하면서 잡아 가두고 많이 때렸습니다. 추열(推閱)하는 말을 들은 사람은 없으나, 교우들의 말이 '김선달은 잘 치명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 때 교우 네 사람이 함께 잡혀 형벌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는데, 김선달이 먼저 살아나고 다른 교우들도 살아났습니다. 그가 위로하며 말하기를 '나는 치명하여 죽을 것이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 오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다섯 사람이 다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는데, 펠릭스 베드로는 특별히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이는 51세였습니다. 동래 절영도 강 마리아 기록하옵니다. "(「병인박해 치명 사적」제3권, 절두산 순교 기넘관 소장)

그의 순교로 인하여 가족들은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모든 것을 잃고 흩어져 유랑하게 되었다.(한국의 성지 http://www.paxkorea.co.kr)

제주교구는 '제주의 사도' 김기량 펠릭스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2005년 4월24일 순교자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기량 순교 현양비 축복 및 제막식을 가졌다.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족보에 김기량의 생몰년월일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으며, 제막식에는 함덕리에 거주하는 김기량의 5대손이 참석하였다.

김기량의 생가 터에는 현재 함덕제주카약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위 스레트집 사진은 2006년 모습이다.
《작성 15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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