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33세손..용담2동 전주이씨계성군파입도조(이팽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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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33세손..용담2동 전주이씨계성군파입도조(이팽형)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2.04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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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동 다호마을에 안장하였다. 명당이라고 일컬어진다.

용담2동 전주이씨계성군파입도조(이팽형)묘

 

위치 ; 제주시 용담2동 1853. 다호마을에서 동남쪽 소나무숲 사이
시대 ; 조선
유형 ; 묘

용담2동_이팽형묘옛묘비
용담2동_이팽형묘

 

전주이씨 계성군파 입도조는 이팽형이다. 이팽형(李彭馨)은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33세손이며 중시조 이성규(李成규)의 11세손이다. 선조9년(1576)에 경기도 고양군에서 이덕인(李德仁)의 아들로 출생하여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증조 이류(李瑠)가 명종1년(1545) 을사사화 때 윤원형의 무고로 참화를 당하여 가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11년(1516) 9월 28일(병오) 기사에는 〈헌부가 아뢰기를, “… 이유(李瑠)는 장오를 범했으니 먼저 파직하고 추국해야 합당하고, …”하니, 전교하기를, “이유는 바야흐로 가두고 추국하는 중이니 결말을 보고 죄주겠다.”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조부 이회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9년(1503) 9월 14일 기사에 〈전교하기를, “내관(內官) 박세당(朴世戇)·이회(李誨)를 장(杖) 1백 대를 때려 변방 먼 곳으로 군역(軍役)에 충당하며, 고신(告身)을 다 뺏고, 김귀지(金貴之)는 고신 한 등급을 뺏으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선조32년(1599) 5월 25일 기사에는 〈이비(吏批)가 아뢰기를“정양정(正陽正) 이회(李誨)의 처 이씨(李氏)가 정장(呈狀)하기를 ‘시아비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남편 정양정 이회가 이어받았으니, 아들 이덕인(李德仁)이 마땅히 그 주인으로서 상직(賞職)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종친으로 지금의 나이가 14세라서 올해 말에 부수(副守)가 되니, 그 벼슬을 받은 뒤에 상직을 받도록 입계하여 시행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품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정양정의 일은 이조가 살펴서 하라.”하였다.〉고 하였다.

이팽형의 아버지 이덕인(회은군, 제9대 임금 성종의 16남 가운데 2자인 계성군의 증손)은 인조22년(1644년) 심기원 등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는 데 당사자로 연루되어 인조22년(1644)에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가 1645년에 서울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인조가 숙부(叔父)인 인성군과 왕족 이덕인을 죽인 것은 자신의 왕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 仁祖18년 7월 21일에 〈홍무적·이천기·이덕인·안응형·윤득열·목성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는 기록이 있고


승정원일기에는
인조22년 4월 24일 〈傳曰, 德仁之名, 雖出於賊招, 預謀之跡, 略不現著, 故予隱其無罪而就死, 意欲置之絶島, 以全其命. 今者不幸鄭譯, 有所云云, 未停啓前, 彼若入來, 則事勢難處, 此意密言于兩司, 使之卽爲停論, 明日內發送配所.〉
인조22년 6월 11일 〈鞫廳啓辭. 答曰, 依啓。永祿姑爲仍囚, 德仁之罪, 旣已議處, 卿等其勿更言.〉
인조22년 7월 22일 〈又啓曰, 以本府啓辭, 依前例處之事, 傳敎矣. 臣等, 取考戊辰年謄錄, 則逆珙時特命使之自處矣. 遵依聖敎, 當用右例擧行, 而重念珙, 則王室至親, 德仁, 特一末裔宗人, 地位懸絶, 不可與珙, 一樣用律, 大臣之意, 亦以爲然. 依前啓辭, 馳遣都事, 以正常刑, 而緣坐籍沒等事, 亦當依律文擧行, 敢啓. 傳曰, 勿爲緣坐籍沒, 只賜藥似可, 舊例相考擧行.〉
인조22년 7월 29일 〈義禁府啓曰, 德仁正刑事, 臺諫合啓, 已爲停啓, 發遣都事, 馳往配所, 卽爲賜藥之意, 敢啓. 傳曰, 知道.〉라고 하여 사약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며
인조22년 8월 7일 〈義禁府啓曰, 逆賊德仁, 律應緣坐人等, 漢城府牒呈內, 德仁前妻女順兮年二十七, 後妻禮伊年二十八, 後妻女婉兮年五, 次女愛兮年三, 妾己善年二十六, 妾子僜伊年七, 妾次子壽僜年三云. 順兮則依律文旣緣坐, 後妻禮伊及女婉兮, 次女愛兮, 妾己善等, 令掌隷院爲奴定屬, 妾子僜伊, 定配爲奴, 而妾次子壽僜, 則年三歲, 依傳敎勿爲定配, 只爲奴事, 亦爲掌隷院擧行, 何如? 傳曰, 依啓. 子女爲奴一款, 勿施.〉라는 기사가 있다.

이덕인(李德仁)의 서자 이팽형(李彭馨)에 대한 기록은 제주인물사를 다룬 책자들과 전주이씨 족보가 서로 다르다.

제주인물사를 다룬 대부분의 책자에서는 이팽형(1576년생)은 선조29년(1596) 21세인 젊은 나이에 현실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세속의 명리를 떠나 제주에 낙향, 두목골(현재의 제주시 이도1동 부근)에 정착해 임윤화의 딸을 맞아 아들 이득춘을 낳았으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다가 3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고, 외아들이던 이득춘은 제주에서 아들 13명을 둬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반면 전주이씨 계성군파 제주특별자치도 종친회는 입도조인 이팽형이 제주를 찾은 시기를 다르게 보고 있다.

종친회가 제시한 족보 등에 따르면 이팽형은 아버지가 제주로 유배된 1644년 이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 이덕인을 돌보려 제주 두목골에 정착, 아들 이득춘을 얻고 1665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득춘이 아들 13명을 낳아 가계가 번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제민일보 100901 장공남 기자)

이팽형의 묘는 제주시 이도2동 현재의 종친회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이호동 다호마을에 안장하였다. 명당이라고 일컬어진다.
《작성 1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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