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조천중 설립에 기여..신촌리 조규훈현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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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조천중 설립에 기여..신촌리 조규훈현창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2.08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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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부지는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중학교 설립..졸업생들 송덕사업회 조직, 훈장 추서

신촌리 조규훈현창비


위치 ; 신촌리 2498번지. 남생이못 바로 서쪽 옆
유형 ; 기념비

 

신촌리_조규훈현창비
조규훈

 

조규훈(1906년12월16일~2000년7월18일)은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민족교육과 조국 부흥에 쏟아붓는 등 향토 발전에 혼신의 봉사를 해온 인물이다. 신촌리 출생으로 1923년 도일하여 벌목 사업과 제재소, 고무공장 경영 등으로 성공하였다.

조규훈은 신촌리 2462번지(現 조군현 가옥)에서 태어났다. 조군현의 부친 조규창과는 4촌 간이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아버지 댁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어서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곧 도착했을 때는 고베에서의 재봉일을 하면서 생활했다. 야학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밤10시까지 일을 해야 해서 갈 수 없었다. 20시간 일하고 4시간 자야했다. 그래서 학업은 포기했다. 3년여 고무공장에서 밤낮 일을 하며 모은 돈 5000엔으로 벌목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그는 스물둘의 청년이었다. 그 후 그는 어느덧 하리마산업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경제인으로 일본 경제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일본 경제계 거물이 견학을 올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음력 추석(9월 20일)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사업을 하던 중, 조선인 노동자 등 60여명을 모아 '백두동지회'(머리가 백발이 되더라도 조국의 부흥을 위해 힘을 모으자는 뜻)를 결성하고 배를 빌려 징용 노동자들을 조국으로 실어날랐다.

1946년 3월 200만엔을 들여 오사카시 스미요시구에 일본에 징용된 젊은이들을 조국의 산업 역군으로 키우는 데 목표를 두고 건국공업학교와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이를 건국 초ㆍ중ㆍ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1949년 5월 문부성의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 백두학원(白頭學院)을 설립,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993년 발간된 백두학원 소식지에서 "인종 차별과 언어 장벽 속에 하루 20시간을 일만 하다가, 조국의 발전을 위해 젊은 인재들을 육성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

백두학원 건국학교에는 한국인의 시각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어 시간에는 한국어로만 수업을 하며, 제주도 출신 학생들이 30% 이상 다니고 있다.

1948년에는 주일 한국 대표부 공관과 관사 임차 비용으로 사재 1300만엔을 내놓았으며, 효고현의 가와사키중공업 부속병원 건물을 사들여 일본인 전쟁 피해자를 상대로 1945년부터 1951년까지 하루 평균 600여명을 수용하는 구호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제7,8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단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업의 실패와 좌절도 있었다. 말년에는 재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사회에 모든 것을 헌납했으나 아내의 옷 한 벌에도 인색했던 남편이었다고 한다.

1946년 재일본 신촌친목회의 일원으로 고향에 조천중학교 건립에 필요한 설계도와 건축 자재를 보내 학교 건립을 도왔다. 보통 읍에는 읍의 명칭을 딴 중학교가 읍소재지에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천중학교는 읍소재지가 아닌 신촌리에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가서 살고 있던 신촌리 출신 재일동포들 중에 사업적으로도 성공한 조규훈 선생을 중심으로 돈을 모아 설계도면과 학교를 지을 나무를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신촌리 포구 안으로 배가 들어올 수 없어서 신촌 앞바다에 내려놓으니 동네 청년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엄청난 양의 나무들을 뭍으로 미는 작업을 했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나서서 그 나무들을 끌어올리고 지금의 조천중학교 자리까지 달구지로 옮겨서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학교 부지는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마련하고서 중학교를 설립했다.

조천중학교 졸업생 40여명은 2009년 11월 25일 '조규훈 선생 송덕사업회'를 만들어 공덕비 건립과 함께 정부 훈장 추서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일본에도 조규훈 선생 현창준비회(회장 이정림)가 조직되었다.

2011년 10월 5일 제5회 세계한인의 날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또한 2013년에는 제주대 재일제주인센터가 '제일제주인의 민족교육-민족교육의 선구자 재일제주인 조규훈을 기억하며'라는 주제로 학술대회와 특별전시를 열기도 했다. JIBS에서는 2011년 2월에 〈일본에 심은 민족혼 新村 조규훈〉을 방송하기도 했다.

그토록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고향 땅. 한 번도 밟지 못했던 그는 결국 그의 이름자와 흑백 사진이 새겨진 현창비로 귀향했다. 현창사업회 이정림 회장은 그의 이름자 앞에 고향의 이름 '신촌'이란 호를 헌사했다.
《작성 1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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