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당군(唐軍) 이끌고 백제 정략 참가..애월리 풍기진씨 입도조 진계백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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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당군(唐軍) 이끌고 백제 정략 참가..애월리 풍기진씨 입도조 진계백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4.2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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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계백(秦季伯)은 입국 시조 진필명(秦弼明)의 18세손이며 중시조 진원(秦元)의 3세손이다.

애월리 풍기진씨입도조진계백 묘

 

위치 ; 애월리 1093번지. 애월사거리 서쪽 좁은 농로로 들어서서 1.2km 지점 경작지 안. 과오름의 북쪽 끝 아래에 해당한다.
유형 ; 묘
시기 ; 고려말~조선초
입향시기/공민왕20년(1371)
성씨시조 = 진필명(秦弼明)
입향시조 = 진계백(秦季伯)

 

애월리_진계백묘

 

진씨(秦氏)는 중국 황제(黃帝)의 후손인 고신씨(高辛氏)의 아들 계중(季仲)의 증손인 미(靡)의 16세손 희자(熙子)가 주(周)나라 선왕을 섬기면서 많은 공을 세워 웅주(雄州)를 받았고 진씨를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풍기진씨족보(豊基秦氏族譜)》에 의하면 풍기진씨의 시조 진필명(秦弼明)은 원래 당나라 태원(太原) 사람으로 중국 당나라 고종 무덕7년(624, 甲申) 오주(吳州)에서 태어났다.

당 고종 때인 태종무열왕7년(660) 병부시랑으로서 신라와 唐나라 연합군에 편성되어 특별명령으로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임명되어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당군(唐軍)을 이끌고 백제 정략에 참가했다. 신라 장군 김유신과 더불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 정벌에 참전 백제를 패망시키니 신라 30대 문무왕(661~681)이 큰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태원백(太原伯)으로 특별히 봉하였다.

서기668년 고구려 패주(浿州)땅의 평양성이 함락되고 난 뒤 류경(柳京 지금의 평양)에 다달아서 보니 대동강을 끼고 있는 도읍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성격이 유순하며 “시”와 “풍류”가 뛰어난 문화인들을 보고 감탄하며 “그 옛날 기자(箕子)가 거느리고 온 5천이 넘는 사람들 틈에 나 또한 한 몫을 더하고자 함이라”하며 마음을 굳게 다지고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한 뒤(귀화절차를 밟음) 이 땅에 삶을 이룩하니 오늘의 “진씨(秦氏)” 시조가 된 것이다.(디트뉴스24 김진우의 족보이야기)

따라서 우리나라의 진(秦)씨는 모두 진필명(秦弼明)에게서 비롯되었으므로 우리나라 진씨의 도시조는 진필명(秦弼明)이다.

그 후 진필명의 15세손 진질명이 고려 의종 때 문과(文科大科)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종1품 정승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시정을 총리함)으로 고려 명종17년(1187) 조원정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기주부원군(基州府院君)에 봉해졌다.

본관으로 삼은 풍기는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기목진(基木鎭)이었다. 고려 태조23년(940) 기주(基州)로 개칭되었고, 현종9년(1018) 안동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명종2년(1172)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으며, 공양왕1년(1390) 은풍현(殷豊縣)을 병합하였다. 조선 태종13년(1413)에 기천현(基川縣)으로 개칭하여 오다가 세종32년(1450) 은풍(殷豊)과 기천(基川)을 합하여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 풍기군이 되었다가 1914년 영주군에 통합되었다. 1973년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경북 영주시 풍기읍이다.

제주입도조인 진계백(秦季伯)은 입국 시조 진필명(秦弼明)의 18세손이며 중시조 진원(秦元)의 3세손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벼슬이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나 권신(權臣) 홍륜(洪倫)․최만생(崔萬生)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화가 미칠 것을 미리 알고 공민왕20년(1371)에 가족과 노비 등을 이끌고 제주목 애월리에 피난 입도하였다.

입도 당시 제주에는 원의 목자 석가을(石加乙) 등의 소란(騷亂)이 극심하였는데 공민왕23년(1374) 최영장군이 목호난을 평정한 후 최영이 외척인 진계백을 방문하여 피난생활의 어려움을 위로하고 귀경을 권하였으나 국정의 혼란과 불의가 만연함을 한탄하면서 그대로 남았다.

최영은 만호 김중광을 시켜 집을 지어 주고 면포 7단과 군량으로 가져왔던 양곡 30석 등을 지원하게 하여 생계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제주선현지(209~210쪽)에 의하면 진계백의 묘는 원래 방묘(사회적 지위가 인정되지 않고서는 방묘가 인정되지 않았다)였다고 한다.

묘 앞부분에 원래 방묘였음을 짐작케 하는 석렬이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 묘의 전체 모양은 앞이 반원형이고 뒤가 삼각형인 이른바 용묘이다. 좌·우와 뒤는 산담으로 둘려 있지만 앞은 트여 있고 좌우에 배롱나무를 심어 조경하였다. 동자석이나 비석 등 석물(石物)은 모두 현대에 조성한 것들이다.

귀성(貴姓)인 진씨는 청주좌씨와 더불어 제주도에 많은 인구를 가진 귀화 씨족이다. 제주를 거점으로 그 혈통을 이어온 진씨는 관계(官界)에 진출한 두드러진 흔적이 없어 타 가문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입도조 진계백(秦季伯)이 고려 말의 혼란기에 살면서 골육상잔과 모함으로 여념이 없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낙향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제주에 사는 진씨는 1950년 말까지 본관을 진주(晋州)로 통일하여 오다가 각 파간의 후손들이 본관의 근원을 확인하여 보자는 취지하에 조사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며 1960년 5월 27일자로 적격 판결이 내려져 장파(長派: 판포)의 일부와 말파(末派: 납읍)인 진의한(秦義漢)의 후손들이 본관 진주(晋州)를 풍기(豊基)로 정정하기에 이르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런 관계로 옛 본관인 진주를 고수하고 있는 쪽은 중파(仲派: 명월)인 진인한(秦仁漢)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장파(長派: 판포)에 속하는 일부 후손들이 진씨가 우리나라에 귀화하기 전 중국에서의 근본이 대원(大元)이었다는 역사적인 고증을 들어 본관을 대원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 제주지방법원에 본관에 대한 호적 정정 허가 신청을 내고 1968년 9월 26일자로 '풍기를 대원으로 변경함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결정 판결을 받았다.
《작성 16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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