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879년 목사 백낙연이 창건..이도1동 사마재(멸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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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879년 목사 백낙연이 창건..이도1동 사마재(멸실)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5.2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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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방 생원(生員), 진사(進仕)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 유생들 모여 학문 연마하던 곳

이도1동 사마재(멸실) 터

위치 ; 표석이 있는 곳은 이도1동 1421-1번지(제주시 오현길 75). 동문시장 내 제주농협 중앙지점 앞이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김동전 집필)에는 이도1동 1406번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 번지는 중앙로 길 한복판이다.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교육기관

이도1동_사마재터

 

사마재(司馬齋)는 1879년(고종 16)에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창건한 것으로 제주지방의 생원(生員), 진사(進仕) 등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이들은 이곳에 모여 강독 강론을 펴기도 하고, 대과 준비를 위한 강습을 받기도 하였다.

1898년 8월에는 유배 온 이세직(李世稙)이 사마재에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을 불러 모아 일본어를 가르쳤다.

당시 제주에 유배 왔던 운양 김윤식이 남긴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보면 ‘처음에 이국장 세직이 사마재에 세를 내어 살면서, 학생들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니 읍내 소년배(少年輩)가 많이 그를 쫓아 다녔는데 적객(謫客) 이태황(李台璜)과 최형순(崔亨順)도 가서 배우고 있다.

그런데 이태황이 세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 훈장 이규항(李奎恒)이 이 사실을 알고 이세직과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들이 왜놈을 닮을까 두렵다’고 하자 사제(師弟) 모두가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는가 하면 사마재 마당에 세우고 그를 책망하였다.

이 훈장은 당시 육십난 노인으로 유생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소년배들에게 욕을 당하자 통문으로 유생 39명을 불러 모이게 하고 ‘잡것들(雜類)의 소굴(일어 강습소로 쓰이고 있는 사마재)을 돌려달라’고 관에 호소했다.

이에 목사는 ‘적거인(謫居人)은 마땅히 두문(杜門)하여야 함에도 무리를 모아 일어를 가르친다며 사단(事端)을 일으키고 있다며 사마재는 유림에게 돌려주고, 학도들은 해산하라. 때리고 욕을 한 사람은 잡아 가두고 엄히 징계하라’고 명했다.

이 사건은 당시 구한말 제주에도 일본어강습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는 많은 소년들은 물론 유배객들까지 새로운 문물을 접하려는 의식이 꿈틀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배일감정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마재의 흔적은 없고 표석이 세워져 있다.
《작성 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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