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19년 제주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용강동 박두규 지사 추모비
상태바
[향토문화] 1919년 제주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용강동 박두규 지사 추모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5.26 07: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천에 있는 근대식 서당 신명사숙(新明私塾) 교사로 재직

용강동 박두규 지사 추모비

건국훈장 애족장(2008년 3월1일)
위치 : 제주시 용강동 193-3번지. 밀양박씨가족묘지 내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추모비

용강동_박두규지사추모비舊
용강동_박두규지사추모비

 

박두규 지사는 1919년 제주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이다. 가족묘지에는 1997년과 2009년에 세운 2개의 추모비가 있다.

1997년에 세운 〈애국지사 朴斗圭선생 추모비〉에는

〈공은 망국의 치욕에 울분을 품었던 열혈남아이다. 1919년 조천 기미 독립만세의 선도자로서 3월23일 연행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8월형이 확정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1월 19일 석방되어 끝내 절의를 굽히지 않고 同味會를 조직 민중계목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자 왜경의 미행 감시에 시달려 황해의 연평도로 은신 광복의 날을 고대하였다.

공의 본관은 밀양이요 아호는 常光이며, 아버지 朴熙亨과 어머니 金仲亨의 장남으로 1987년 6월14일 조천리 2755에서 태어나 제주농업학교를 6회로 졸업하고 향리의 신명사숙에서 교편을 잡아 민족교육에 열정을 쏟던 중 문도를 일으켜 조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공은 淸州韓氏 元斌과 만나 銓祐 銓祚 銓祜 銓祗 銓訓 銓秘 銓福 七雄을 낳았다. 조국이 광복되어 며칠 지나 8남을 낳자 銓擇解放이란 뜻으로 銓解라 명명하고 남하하려 하자 삼팔선이 막혀 황해도 해주군 취하면에 살았다.

1950년 한국동란의 와중에 銓解는 어머니 梁春錫의 등에 업혀 남하하였기에 조상을 위한 향화는 이었으니 천우신조가 아닌가! 아! 常光은 항상 빛나는 선각자로다. 이 땅을 사랑했길레 애국의 표상이요 후생을 가르쳤기에 애복의 본보기였네. 공의 탄신 일백주년에 즈음하여 그 위대한 생애에 고개 숙이네.

부인 梁春錫 아들 朴銓解 며느리 李美成 손 ○○ ○○ 손녀 ○○ 손녀사위 ○○○ 현손 ○○○
서기 1997년 歲在丁丑 청명날

북제주군교육장 金燦洽 글을 짓고 대울 윤호삼은 글씨를 쓰다
애국지사 朴斗圭선생추모비건립위원회 代表 朴偉圭
아들 제주도교육청장학사 銓解 삼가 세움〉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2009년 12월22일 제주도지사가 세운〈애국지사 常光 朴斗圭 志士 追慕碑〉에는
〈公은 密陽朴氏 淸齋公派 入島始祖 嘉善大夫 孝臣公의 八代孫인 熙亨公과 金仲亨의 장남으로 一八九七年六月十四日 朝天에서 태어나 銓祐 銓祚 銓祜 銓祗 銓秘 銓福 七雄 銓解(妻 李美成)를 낳았다. 孫으로는 (中略)

公은 망국의 치욕에 울분을 참지 못한 열혈남아로서 늘 광복을 그리며 살았기에 호를 常光이라 했다. 1916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 1919년 동지 14인과 함께 미밋동산에서 3월21일부터 나흘 동안 조천만세운동을 전개할 때에 新明私塾의 젊은 교사로 학생들을 동참시킨 것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구실로 22일 체포되고 8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同味會를 조직하고 순국한 白膺善의 묘비를 건립, 1920년 10월 친일파인 국민협회 총무 鄭丙朝의 반민족적 작태에 협박장을 보냈다가 또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늘 감시에 시달려 황해도 延坪島로 은신 중 조국이 광복되며 여덟째를 낳자 銓迎解放 곧 銓解라 명명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어린 銓解는 어머니 梁春錫의 등에 업혀 남하, 조상에게 香火를 올리니 이는 하늘의 도움이 아닌가!

公은 애국의 표상이요, 애족의 본보기였기에 1997년 탄신 100주년기념비건립추진위에서 비를 세우고 2008년 삼일절에 정부는 그 공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니 민족의 앞길에 지표를 삼고자 하여 이 비를 세웁니다.

2009년 12월 22일 濟州特別自治道知事 謹立〉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 3·1 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 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 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조천의 유림 세력들은 전국의 독립운동 시위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당시 조천 출신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의 3‧1운동에 가담했다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장환이 조천 지역 유지인 김시범(金時範)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설명하자, 김시범·김시은(金時殷) 등은 3월17일경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결행할 것을 다짐하고, 3월19일까지 고재륜을 비롯하여 김형배(金瀅培)·김년배(金年培)·황진식(黃鎭式)·김용찬(金容燦)·백응선(白膺善)·박두규(朴斗圭)·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 1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우의 기일인 3월21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장과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21일 날이 밝자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김시범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500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제주성 내를 향하여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시범·김시은·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되었다.

3월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박두규·김필원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전날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주동자는 연행되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3월23일에도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다시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박두규(朴斗圭)·백응선·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다.

3월24일 조천 오일장날에도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이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고 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 14명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만세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만세 시위 운동으로 1심에서 29명이 기소되어 그중 23명이 1919년 4월26일 광주 지방 법원 제주 지청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다시 공소하여 1919년 5월29일 대구 복심 법원 형사 제1부에서 김시범과 김시은은 각각 1년형, 김용찬과 고재륜은 각각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 14명은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고, 조천에서 교직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주 3·1 운동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 출신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 지역에서 민족 교육 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박두규 지사는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1897년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조천리(朝天里) 275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는 상광(常光)이다. 어렸을 적에는 향리에서 한문을 익혔으나,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916년 3월25일 졸업 이후 조천에 있는 근대식 서당인 신명사숙(新明私塾)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조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명사숙의 학생들을 동참시켰다. 3월22일 2차 시위 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이 선고되어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수감되었다.
출옥 후에는 제주시에 제지(製紙)공장을 설립·운영하였다.

1920년에는 제주도에 와서 신일본주의를 선전하는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총무 정병조에게 협박장을 보내었다가 잡혀서 1921년 3월 광주지방법원지청에서 8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7일자에는〈脅迫狀에 八個月/불복하고 공소해/작년 10월 중순경에 제주(濟州)성내에 들어와서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선전하던 그 회 총무 정병조(鄭丙朝)씨에게 협박장을 보낸 동지 조천 거주 박두규(朴斗奎)는 오래동안 예심중에 있던 바 지난 5일에 광주(光州)지방법원지청에서 징역8개월의 판결언도를 하였는데 박두규는 이에 불복하고 다시 공소할 터이라더라.(광주)〉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정병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미리 알고도 고변하지 않은 죄로 제주에 유배중 1901년 신축교란으로 이배되었다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하게 되자 풀려나서 일본에 지극충성한 악질 친일파이다.

그러나 항상 일제의 감시와 미행을 받자 서해안의 연평도(延坪島)로 건너가 장사를 하였다. 이후에 다시 황해도로 옮겨가서 막걸리 공장을 경영하였다 해방 후에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였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6·25 전쟁 때에 월남하려고 하였으나 부인인 양춘석(梁春錫) 여사와 막내아들만 먼저 월남했고 본인과 다른 식구들은 월남하지 못하였다.

2008년 삼일절을 맞이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작성 160816, 보완 1907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