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청년들의 집단 항일의거..성산읍 고성리 정의면 씨름대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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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청년들의 집단 항일의거..성산읍 고성리 정의면 씨름대회 현장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4.07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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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정의면 대운동회에서 정의면 청년들과 일본인 선원 간에 싸움이 벌어진 사건

성산읍 고성리 정의면 씨름대회 현장

위치 ; 성산읍 고성리 298번지 일대. 속칭 소금막 지경.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항일투쟁의 현장

고성리_씨름장_항쟁_기사(중외일보19270520)
 고성리_씨름항쟁지



정의면 씨름대회 사건이란 1927년 5월 정의면 대운동회에서 정의면 청년들과 일본인 선원 간에 싸움이 벌어진 사건이다.

제주 성산면 성산리 성산포 근처는 우도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황금어장을 이룰 만큼 어족 자원이 풍부하였다.

이에 옛날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시기에는 일본 어부들이 제주 근해에 상륙하여 불법 어업을 감행하고 어장 침탈을 행하였기 때문에 당시 성산포 일대의 청년들과도 자주 싸움이 일어났다.

1927년 5월 27일 정의면 중앙청년회 주최로 정의면대운동회가 열렸는데 고성마을 속칭 소금막 씨름장에서 씨름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씨름대회가 한창 열리던 도중, 당시 고등어 잡이 원양 어업을 하다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하였던 박몽주·윤정도·권해룡·하정구 등의 다른 도 출신 선원과 200여 명의 일본인이 씨름구경을 하다가 선원 중 일부가 주최측의 허가를 받아 씨름 선수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씨름경기에 참가한 선원들은 경기 도중 제주민에 대해 차별적인 언행과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원할한 경기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와중에 다른 도 출신의 박몽주가 정의면 청년과의 씨름경기에서 패하자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재시합을 무리하게 요구하였다.

이에 심판인 박규언[정의면 청년]이 대회 규칙상 불가하다고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타도 출신의 윤정도가 박규언의 빰을 때렸고, 이에 지방민 고태주(高泰株) 등이 일어서서 그 무례함을 책망하자 선원 2백여 명이 일제히 뛰쳐나와 지방민과 격투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500여 명의 정의면 청년들과 200여 명의 일본 어부[다른 도 출신 포함]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이 때 청년운동의 지도자는 당시 중앙청년회 회장이었던 고은삼이었다.

고은삼과 함께 당시 성산리청년회장이었던 송세훈이 주축이 되어, 수세에 몰린 일본인들이 도망쳐 숨기 시작하자 이를 알고는 정의면 청년들을 규합하여 방두포(防頭浦)[지금의 성산읍 신양리 섭지코지 근처]까지 추격하였고 일본 선원과 어부들에게 더욱 폭행을 가하였다.

그 결과 선원 김명선(金明善)과 일본인 웅전원상조(熊田原常造)가 사망하고 지방민 4명과 일본인 1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선원 가운데 2명이 상해를 당하자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진압하고 52명의 정의면 청년들이 체포되어 제주경찰서로 압송되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당시 입회 경찰관 압천일원(押川一元), 목정승(木庭勝)의 증언은, 씨름꾼이 심판원을 구타하자 지방민이 무례함을 항의하였는데 선원 2백여 명이 갑자기 일어서서 각목(角木), 죽봉(竹捧), 의자 등을 손에 잡아 지방민과 대적하여 제지가 불가하였다고 그 원인이 일본이 선원측에 있었다고 하였음에도, 지방민 45명을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성산포 소요 및 상해 치사 사건’이라 칭하고 전남 경찰부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또한 임시 검사국을 설치하는 한편 목포 경찰서의 증원군이 제주도에 들어와 1927년 5월 23일 혐의자 또는 선동자라 하여 92명을 제주경찰서 유치장과 유도장에 가두었다.

조사 후에는 이들 중 52명을 같은 해 5월 25일 목포로 옮겨 조사하였고, 체포된 청년들은 대부분 광주지방법원 재판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당시 싸움을 유발한 일본인 선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1927년 12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는 고은삼(高殷三: 30세, 정의면 청년회장)ㆍ송세훈(宋世勳: 40세, 성산리 청년회장)ㆍ고승운(高承雲: 54세) 등에 징역 3년이 선고하였다.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한 결과 고은삼ㆍ송세훈은 무죄가 되고 나머지는 다음과 같이 형량이 확정되었다.

※고승운(高承雲: 54세, 농업, 오조리)ㆍ한봉희(韓奉禧: 35세, 농업, 성산리)ㆍ박규언(朴奎彦: 31세, 상업, 성산리)ㆍ황봉진(黃鳳辰: 44세, 농업, 시흥리)ㆍ부정휴(夫丁休: 21세, 농업, 시흥리)ㆍ홍경옥(洪景玉: 33세, 목수, 오조리)ㆍ김영화(金英和: 28세, 농업, 종달리)=징역 1년6월

※김창옥(金昌玉: 36세, 중개업, 성산리)ㆍ오환옥(吳還玉: 30세, 농업, 오조리)ㆍ한승택(韓承澤: 22세, 농업, 고성리)=징역 1년 2월

※강홍진(姜弘珍: 41세, 선원, 온평리)ㆍ홍두진(洪頭珍: 33세, 농업, 고성리)ㆍ오주언(吳周彦: 47세, 농업, 오조리)ㆍ선명옥(宣明玉: 24세, 양계업, 조천리)ㆍ박주홍(朴宙洪: 27세, 과자상, 성산리)ㆍ고정화(高定華:25세, 점원, 성산리)ㆍ김성진(金聖辰: 27세, 수육업, 고성리)ㆍ한성옥(韓成玉: 46세, 용인, 온평리)ㆍ이유생(李酉生: 24세, 농업, 시흥리)ㆍ김묘득(金卯得: 37세, 농업, 수산리)ㆍ김경춘(金庚春: 26세, 상업, 온평리)=징역 1년

※김기휴(金起休: 41세, 농업, 신풍리)ㆍ오창순(吳昌順: 30세, 목수, 오조리)=징역 7월

※오두선(吳頭善: 31세, 농업, 난산리)ㆍ정기혁(鄭岐赫: 37세, 농업, 고성리)ㆍ정손호(鄭遜浩: 19세, 농업, 고성리)ㆍ송태춘(宋太善: 21세, 농업, 온평리)ㆍ현시학(玄始鶴: 22세, 농업, 온평리)ㆍ고태영(高泰英: 37세, 농업, 오조리)ㆍ송학수(宋鶴數: 20세, 농업, 온평리)ㆍ강혁호(康奕豪: 36세, 농업, 온평리)ㆍ한원도(韓元道: 19세, 농업, 오조리)ㆍ김만풍(金萬豊: 38세, 상업, 고성리)ㆍ강윤옥(康允玉: 25세, 농업, 오조리)ㆍ고휴규(高烋圭: 37세, 농업, 수산리)ㆍ김생두(金生斗: 26세, 농업, 성산리)ㆍ강승보(康承保: 40세, 농업, 수산리)ㆍ강구옥(康衢玉: 26세, 농업, 오조리)ㆍ김자생(金子生: 26세, 농업, 오조리)ㆍ송문옥(宋文玉: 21세, 농업, 온평리)ㆍ이치규(李致奎: 38세, 온평리)ㆍ홍종학(洪鐘鶴: 28세, 농업, 성산리)ㆍ김경옥(金景玉: 28세, 교원, 고성리)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또 소송비용은 위 피고인들이 공동 부담하라고 하였다.(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수형인 명부)

당시 이 사건의 배후 주도자였던 고은삼과 송세훈은 상고심을 통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가 이 사건을 항일의거가 아닌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어민과 어상들이 성산포 근해에서 불법 어업을 자행하던 시대상황과 1910년 8월 한일합방 이후 더욱 극심해진 민족적 차별과 맞물려, 청년들의 항일 정신이 분출되어 나타난 집단 항일의거였다.

이러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항일 정신은 이후 우도와 구좌 지역으로도 확산되어 1932년 해녀항일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1932년 1월 제주해녀항쟁과 같은 해 5월 추자어민 투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제가 이 사건을 단순한 폭력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이후에도 항일운동으로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당시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국가 차원에서의 정당한 보상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제주도청 홈페이지)

이 사건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향토사가 김석익(金錫翼)은 당시 상황을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름 4월 운동단의 고은삼 등이 일본 어부가 침범하여 어지럽히는 것을 응징하였다. 당시에 일본 어부 수백명이 연해에 출몰하여 인가에서 약탈함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관에서는 심상히 여겨 이를 막지 않았다. 이에 해안촌락 성산 방두 등의 지역이 이 때문에 삭막해지니 사람들이 앙심을 품은 지 오래되었다. 마침 학교 운동회가 열렸는데 갑자기 일본 어부 100여명이 난입하여 멋대로 행패를 부리고 주민들을 모멸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이에 대중이 격노하여 간부 고은삼 등이 몽둥이를 들고 몰아내다가 잘못하여 2명이 죽었다. 일이 알려지자 고은삼 등 10여명은 선동죄로 처벌되었으나 이로부터 왜환은 없어졌다.〉
〈작성 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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