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목지코지 연결 수많은 향리 인재들 나와..김녕리 목지코지석교(牧之串石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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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목지코지 연결 수많은 향리 인재들 나와..김녕리 목지코지석교(牧之串石橋)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0.12.10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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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코지는 풍수상 '청룡'이고 김녕해수욕장 동쪽의 가수코지는 '백호'의 상

김녕리 목지코지석교(牧之串石橋)

목지코지석교(牧之串石橋)
위치 ; 김녕리 6132번지 북쪽 바다. 김녕-동복 간 해안도로에서 바다 쪽으로 가장 길게 돌출된 부분
유형 ; 비보시설(민간신앙)
시대 ; 일본강점기(1939)

김녕리_목지코지석교송덕비

 

김녕리_목지코지석교


목지코지는 풍수상 '청룡'이고 김녕해수욕장 동쪽의 가수코지는 '백호'의 상인데 청룡인 목지곶은 육지와 단절되었기 때문에 총명한 남아가 불구하여, 예로부터 인물은 걸출하였으나 단명하였다고들 전한다.

'김녕초등학교43회동창카페'를 보면 김평문씨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자세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목지곶에 석교가 축조되기 정에는 박제중, 황정화, 한봉준, 한치경, 한인남, 홍종항, 안민서 등 수명의 영재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 하고 요절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러한 일은 마을의 크나큰 손실이었으며, 마을 사람들은 한탄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와 같이 불행을 당할 때마다 식자들은 전술한 풍수지리설을 상기하면서 목지코지를 연결해야만 이 지역에 인재가 많이 날것이라고 했다.

목지곶 절단된 곳에 석교를 축조하고 연륙(육지와 연결)하는 방안을 강구하였으나 당시로서는 공사가 웅대하고 거액의 공사비를 조달할 방도가 없어 좌절되곤 하여 결국 숙원사업으로 남았었다.

1937년 이르러 평소 이 비운을 한탄만 하고 후세들에게 전수하여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여 오던 한진석 , 김병선 두 분의 주동으로 당시 리장이던 박동진을 위시하여 각 조합장 및 유지들을 총망라한 목지곶 석교 축조공사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공사비는 서김녕리 8개 조합의 4년간 생산되는 톳 판매대금을 갹출하여 충당키로 하고, 재무는 전기한 한진석이 공사 감독 겸 총책임은 김병선이 맡았다.

한편 공사기술진은 당시 서김녕리 정미소 북측 구오일시장통의 초가에서 하숙업을 하던 전남해남 출신인 심용택에게 해남 지방에서 석축공사 기술자 및 운반 인부를 모집하도록 청탁하고 이들을 초치하여 1938년 초에 착공하여 1939년 말까지 2년 동안의 공사 끝에 총연장 135미터 높이 8미터의 석교가 준공되었다.

공사비는 공사 준공시까지 2년간은 생산된 톳 판매대 갹출금으로 공사 진척도에 따라 중간불로 지급하였으며, 잔금 2년분의 금액에 대해서는 당시 동김녕리 바진모루 북쪽 해안변에 위치한 톳 가공공장 주인 김만석과 교섭하여 향후 2년간 생산되는 톳을 그 공장에 납품하기로 하여 가정량의 전도금을 선도받아 공사비를 완불하였다. 따라서 공사비의 총액과 기술진의 인원수 등은 알 길이 없어 기재치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후 마을에는 인재가 요절하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게 되고, 장수자가 많음으로서 세인들이 장수촌으로 정하게 되었고, 수많은 향리 출신들이 국내와 각 분야에 걸쳐 요직을 맡아 봉사하고 있으며, 더욱이 재일(在日) 향민 중에는 재계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이와 같이 목지코지를 연결한 결과 수많은 향리의 인재들이 나왔다고 믿고 있다.

석교 축조 전에는 단절된 부위가 바다여서 이곳을 왕래하는 것은 간조시에만 가능했었으나 지금은 언제든지 통행할 수가 있고. 편리하여 속칭 생산교라 부르고 있다.

더욱이 1948년 4월3일 4.3사건의 발생하여 1953년 사건이 종료될 때가지 약 4년간에 걸쳐 전도적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막심하였으나, 김녕리에 피해가 많지 않았던 것은 석교 축조 후의 풍수지리로 인한 은덕으로 전해지고 있다.(구좌읍지 517쪽, 해녀박물관, 김녕초등학교43회동창카페)

지금은 원래의 석교 위에 더 큰 돌들로 덧쌓고 포장했으며 길 좌우에 가드레일도 설치했다. 석교 진입로 맞은편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공덕비 뒷면에는

「목지곶의 시 한 수」라는 제목 아래

‘아! 우뚝 서 있는 웅장한 자연석 비 앞에 길손이시여 잠시 멈추소서. 앞바다 뚝(둑?)으로 뻗쳐나간 목지곶 돌다리 쪽으로 선인들의 한 많은 우여곡절 속에 어버이들의 피와 땀 한 데 엉킨 곳.

사람의 힘으로 일천날을 장장 일백삼십미터의 돌다리 청용맥의 산 줄령(峻嶺?)을 이어져서 천천만만세 길이 빛내리라.

우리 고장 선구자들의 모음(마음?) 한 데 뭉친 원한의 결집으로 고마워라, 그 업적 후세들에게 영원히 영원히 빛나게 하리라.

우리 고장 아름다운 빛 되어 마음 속에 길이길이 기억하소서.

 

서기1995년 월 일 지음 수양 박위규 수감 문학박사 고경환 씀 찬달 현태송

’우측면에는 ‘기념비건립 1995년 3월 일 북제주군청 김녕리민 일동’ 좌측면에는 ‘工事指導者 韓震錫 金炳先 朴東珍 資金支援 金寧里 海女一同 西紀一九四一年 八月 日 竣工’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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