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물과 도로 개발은 필수..교래리 도지사 김영관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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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물과 도로 개발은 필수..교래리 도지사 김영관공적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2.1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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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산허리를 뚫고 제주시~서귀포 간 43㎞ 포장하겠다는 김영관 도지사의 생각은 가히 혁명적 발상

교래리 도지사김영관공적비
 

위치 ; 조천읍 교래리 산137-2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비석(공적비)

교래리_성판악김영관공적비

 

교래리_성판악김영관송덕비뒤


현재의 5.16도로의 모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임도로 개설돼 1943년 지방도로 지정되었다. 고지대의 하천에는 목교와 잠수교가 가설됐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군용 및 전술도로로 이용하려고 했었다.

도로가 개통되자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최단거리 도로로서 비록 자동차 통행은 불가능했지만 한라산 남쪽 주민들의 제주시 왕래가 훨씬 편리해졌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일보 130527)


1945년 해방 이후 활용은 됐지만 4·3사건에 따른 ‘한라산 금족령’으로 1949년부터 1954년까지 5년 동안 폐쇄됐다. 1957년부터 경제부흥 특별회계로 산천단에서 물장올까지 7.4㎞를 임시 보수하는 등 4년 동안 34㎞를 임시방편으로 길을 터놓았다.

이 길은 외도·오라·하귀 등 하천이나 해안에서 채취한 모래와 돌자갈을 운반해 깔아 놓은 ‘비포장 도로’였다.

성판악까지는 어렴풋하게라도 도로의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해발 750m 최고점인 성판악에서 영주교까지 10.28㎞는 땜질 처방은 고사하고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다니기조차 힘들었다.

4·3사건 반발 이후 1960년까지 10년 동안 우마와 차량 왕래가 없고, 인적도 끊기다보니 원시 밀림으로 변한 것이다. 길은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현역 해군제독의 신분으로 제주도지사에 임명된 김영관 준장은 부임 후 의욕적으로 제주개발에 매달렸는데 이를 위해서는 물과 도로의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부임 한 달 후 한신 내무부 장관이 순시한다는 전갈을 받고 일주도로와 횡단도로를 동시에 포장한다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서귀포 방향으로 내려가면서부터는 길의 예전에 만들었던 길은 밀림지대로 변모해 당장 포장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신 장관을 수행한 도로과장은 이에 대해 경제적 효과를 들어 난색을 표명했다.

정부에서는 하루 차량 통행 대수가 880대 정도 돼야 포장 효과가 난다고 분석하고 포장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당시 제주도내 차량 대수는 300대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혁명정신을 강조한 김 지사의 주장은 한 장관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지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각적인 대중앙 로비활동을 벌여 나갔는데, 예산 형편상 일주도로와 횡단도로를 한꺼번에 포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우선순위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자 김 지사는 제주시내를 포장한 다음 횡단도로를 우선 포장키로 결정했으며 박정희 대통령 내도시 제주개발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내무부가 공사를 위해 대여한 용접기, 불도저, 롤러 등 중장비는 김 지사가 해군본부와 절충해 해군 LST편으로 운송될 수 있었다.

당시 도로포장에는 골재를 깔아 기층을 다지고 콜타르를 뿌려 침투시키는 방법이 사용됐다.한라산 산허리를 뚫고 제주시~서귀포 간 43㎞를 포장하겠다는 김영관 도지사의 생각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도로포장사업이 착수된 후 횡단도로는 급속히 추진됐다. 제1횡단도로는 일제 때 임도로 개설돼 있었지만 그 동안 방치된 데다 자유당 시절인 1958년부터 부분적으로 정비되는 데 그쳤고 포장은 공법상 어렵다는 현지답사 기술진의 난색 표명으로 무산된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김 지사는 도로개발에 눈을 돌렸는데 시급성과 효용성을 뒤로 하고 횡단도로 포장을 우선시했다. 이는 무리해서라도 횡단도로가 포장되면 일주도로는 자연히 포장되지만 일주도로에 먼저 손을 대면 횡단도로 포장은 요원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4.3 때 해군 초계정 함장으로 자주 제주를 찾았던 김 지사는 4.3 후유증이 크다는 것을 재삼 인식하고 상처 치유를 위해서도 중산간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서 긍정적 반응을 얻은 김 지사는 당초 1962년 예산에서 제외됐던 사업비를 로비를 통해 추경예산에 반영시킨 한편 적극적인 대중앙 로비를 통해 예산을 확보,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이 같은 김 지사의 열의에 박 의장의 적극적인 지지가 겹치면서 1962년 3월 24일 제주도청 앞 공설운동장에서 2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치러진 횡단도로 포장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이날 기공식은 전국에 실황중계될 정도로 혁명정부의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졌으며 당시 국내 최고 인기가수인 송민도, 도미, 박재란 등을 비롯해 해군함에 의해 수송된 해군군악대와 의장대, 해병고적대 등이 축하공연을 할 정도로 화려했다.

박 의장은 1962년 5월 24일 두 번째 제주 방문 때 제주시 아라동 일대 횡단도로 포장공사 현장을 직접 찾은 것을 비롯해 다음해에도 내도 즉시 횡단도로 공사장에 가 조기 완공을 지시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한라산 횡단도로 공사는 제주도 지방과장에서 1962년 산업개발국장으로 승진한 김한준 국장과 김 국장이 추천한 홍성림 건설과장의 책임 아래 1년 8개월에 걸친 공사끝에 준공했다.

정부로부터 임대받은 중장비들을 김영관 지사가 당시 이성호 5대 해군참모총장에게 부탁해 해군 LST함정으로 인천항에서 제주도로 운송해 주었다.

10월2일 해군 LST 809호함정이 도로포장용 중장비인 불도저와 콤부랏샤, 롤러와 제주도의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하와이에서 들여온 지하수 심정굴착기, 관급자재인 아스팔트 1700드럼을 가득 싣고 제주항에 입항하였다.

이때 시작된 한라산 횡단도로 포장공사는 제주도청에서 산천단까지의 7km 구간이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토목건설업체인 삼부토건에게 맡겨졌다.

1963년 10월 11일 횡단도로 개통식이 제주시와 서귀포에서 성대하게 거행됐다. 그런데 너비 6~7m로 확장됐으나 포장 구간이 20㎞에 불과해 전체 공정률이 70%에 그쳤음에도 서둘러 치러진 개통식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때문이었다.


성판악-영주교 간 10.28㎞ 공사는 장비가 있어도 밀림 지대로 변모해 들어갈 수도 없었는데 당시 보유한 건설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도로 폭 6.5m와 양쪽에 배수로 1m를 개설하는 공사하는데 곡괭이와 삽, 정을 이용하는 등 인력으로 충당해야 했다.

먼저 우거진 잡목을 베는 것을 시작으로 지게로 흙을 져서 날랐다. 화약을 이용하는 발파작업도 거의 없었고 순수하게 인부들의 땀으로 10㎞를 뚫어 나간 것이다.


김중근 전 제주도 건설교통국장(72)의 증언에 따르면 21살이던 1962년 3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동안 수악교에 설치된 천막에서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공사를 감독했다. GMC 마크가 붙은 군용트럭은 유일한 장비였다. 이 트럭으로 쌀과 드럼통에 담은 식수를 수악교 천막까지 날랐다.

그는 “성판악에서 영주교까지 미 개통 10㎞ 구간은 삽과 곡괭이로 도로를 다지며 사람의 손으로 뚫어 놓았다”며 “지금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저녁이 돼야 삽을 놓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전남 완도에서 인부들을 많이 모집했고, 40여 명이 천막에 머물며 생활을 했다. 개통을 서두르기 위해 일당이 아닌 하루에 진척된 공사 구간에 따라 노임이 지불됐다.

그는 “보리밥과 된장, 산에서 나는 나물로 식사를 해결했는데 멸치볶음은 최고의 반찬이었다”며 “이런 걸 먹고도 당시 인부들은 지금보다 힘이 세서 무거운 돌과 흙을 손수 지고 날랐다”고 말했다. 횡단도로 개통식을 맞은 서귀포는 온통 잔치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제주시와 왕래를 일주도로에 의존했던 서귀포 주민들은 교통시간을 절반 가량 단축시킨 횡단도로의 등장에 감격해 했다. 김영관 지사는 서귀포에서, 조성근 건설부장관은 제주시에서 각각 기념식을 마치고 동시에 마이크로버스와 트럭 등에 타고 출발해 수악교에서 만났다.


이날 서귀포에서는 극장이 무료 개방됐고 교통업과 접객업소는 손님들에게 20%의 할인 서비스를 실시했다. 횡단도로 개통과 더불어 정기 버스 노선도 개설돼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했는데, 편도 2시간이 걸렸다. 한편 제1횡단도로가 전면 개통된 것은 1969년 10월 11일의 일이었다.


이후 개통된 제주-서귀 정기노선인 20인승 마이크로버스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석이었다. 공무원과 회사원들은 제주와 서귀포를 오가며 출·퇴근이 가능해졌다.


한편 김 지사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한라산이 천연림으로 덮여 있으나 쓸 만한 나무가 없다는 점을 들어 활엽수종을 벌채해 점차 쓸모 있는 경제 수종으로 바꾼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다 이에 반대하는 학계. 언론계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수종 교체 사업은 시작된 지 1년 만에 중단됐다.(제주일보 110422, 110617, 130527)


비석 앞면에는 道知事 金榮寬功績碑, 뒷면에는 頌金榮寬知事 한라산록의 기적을 다짐하던 그대 열을 모아 손을 부친 1962년 3월 24일 백리 가파른 산을 뚫어 잠자던 들판에 생명을 불어넣은 아 그대는 이 땅을 연 파이오니어. 밀물처럼 일어오는 이 길의 감동과 함께 우리는 그대의 위업을 염원히 추모하리라. 33만 도민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67년 4월 15일, 좌측면에는 建立 濟州道知事 鄭우식이라고 되어 있다.
《작성 130112, 보완 1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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