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누각에 올라 만 리 바다를 굽어보노라니..삼도2동 제주목관아망경루(望京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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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누각에 올라 만 리 바다를 굽어보노라니..삼도2동 제주목관아망경루(望京樓)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2.13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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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京이 서울을 바라본다는 뜻이므로 지방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적당하지 않은 이름이다.

삼도2동 제주목관아망경루(望京樓)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33-7번지 제주목관아 내 북쪽
유형 ; 관아건물
시대 ; 조선시대

 

삼도2동_망경루



망경루는 조선시대에 지방의 20개 목(牧) 가운데 ‘제주목’에만 유일하게 존재했던 2층 누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임금이 있는 한양을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망경루는 특히 제주 앞바다로 침범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하였다.


망경루는 명종11년(1556)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창건한 누각이었다. 이후 현종9년(1668)에 제주목사 이연이 개건하였고, 순조6년(1806)에 제주목사 박종주가 다시 개건하였다. 철종12년(1861)에 제주목사 신종익이 좌탑(左榻)을 세웠다. 榻(탑)은 길고 좁게 만든 평상이다.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지냈던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나와 있듯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 형태의 2층 목조 건물이었다. 오점(吳霑)의 개건 상량문이 전해지고 있다.


양헌수(梁憲洙) 목사가 고종2년(1865) 흉년으로 굶는 백성들을 봉미(俸米 = 녹봉으로 주는 쌀) 2천 석을 내놓고 또 힘을 다해 재물을 마련해서 구휼한 후에 이곳 망경루(望京樓)에 도민 대표 1000명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한국매일 160222)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제주도청을 만든다며 일제가 강제로 헐어버렸다. 망경루는 1991년부터 추진된 ‘제주목 관아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2월 이형상의 『탐라순력도』를 바탕으로 복원이 완료되었다.


백성들을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 대하듯이 걱정한다는 시민여상(視民如傷)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이 각 지방마다 누각 이름을 망경루라고 했듯이 조망의 의미보다 지역민들의 시민여상하듯 민생을 살핀다는 의미(한국매일 160222)라고 하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望京이 서울을 바라본다는 뜻이므로 지방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적당하지 않은 이름이라고 본다.

목사가 백성들을 바라보며 백성의 살림에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 서울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으니 어찌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까에 생각이 미치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1708∼1766)이 제주성의 모습을 기록하여 돌아와서 아버님께 올리는(記濟州城形 歸呈大人) 시에서 망경루(望京樓)에 대해서 이렇게 읊었다.(한국매일 160222)


閣東近有望京樓 누각 동쪽 가까운 곳에 망경루가 있으니
朱楹畫棟雲外浮 붉은 기둥 단청한 들보가 구름 밖에 떠있네.
登臨俯視萬里海 누각에 올라 만 리 바다를 굽어보노라니
遠客羈人可暢愁 먼 곳의 손과 나그네가 시름을 풀 수 있네.

대구읍성에도 고종7년(1870)에 세운 망경루라는 누각이 있었고, 경남 산청, 충북 충주에도 망경루가 있었다는 자료들이 있어 각 지방마다 누각 이름을 망경루라고 붙이는 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도 북경을 바라본다는 망경루가 있다.


망경루 1층에는 목관아를 복원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되었던 탐라순력도에 대한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작성 130209, 보완 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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