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겐 악몽의 장소..표선리 한모살(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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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겐 악몽의 장소..표선리 한모살(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2.1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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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해수욕장 서쪽에 펼쳐진 모래밭인 한모살 인근에 지금은 표선민속촌과 표선면도서관이 들어섰다

표선리 한모살(학살터)
 

위치 ; 표선면 표선리 40-65번지
유형 ; 민간인 학살터
시대 ; 대한민국

표선리_한모살학살터

 

 

옛날은 그 넓은 지대가 沼로 형성되었었는데 인접한 남초곶에 무성한 나무를 설명디 할머니가 주동이 되어 이를 베어다가 하룻밤 사이에 깊은 소를 메워 지금과 같은 양상으로 변모되었다는 전설(표선면향토사 70쪽)이 깃들어 있는 표선리 한모살은 해안사구가 펼쳐진 곳이다.

이곳은 4·3 당시 표선면, 남원면 일대 주민들이 희생됐던 일상적인 총살장이었다. 표선면과 남원면의 주민, 특히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겐 악몽의 장소이기도 하다.

어떤 혐의에 의해 붙들려 오거나, 마을이 초토화된 후 산간도피중이던 주민이 현장에서 붙들리면 대부분 이곳에 끌려와서 총살당했다.

특히 가시리, 토산리 등 표선면 관내 대표적인 집단학살 피해 지역 주민들도 주로 이곳에서 집단학살당했다. 뿐만 아니라 남원면 의귀리ㆍ한남리ㆍ수망리 등 중산간 마을 주민들도 이곳에서 많이 희생됐다.

특히 이곳에선 가족 단위로 피신했던 산간 주민들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나 노약자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이곳이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총살장이 된 것은 표선리에 소재한 면사무소에 군부대가 상주했기 때문이다. 면사무소 앞에 임시로 움막을 지어 유치장으로 활용했는데, 유치장에 끌려 온 주민들 대부분을 이곳에서 총살한 것이다.

또 표선리 젊은 남자들로 민보단이 조직되어 토벌대를 보조했는데, 군인들은 민보단을 주민 처형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다. 즉, 학살대상자를 한모살에 끌고 와 민보단으로 하여금 죽창으로 찔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주저하던 민보단원들은 총을 든 군인들의 다그침에 어쩔 수 없이 이웃 주민을 향해 달려들어 또 다른 정신적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표선리에서 당시 민보단 활동을 했던 금촌칠(남, 03년 78세) 씨는 “가시리 송 아무개를 죽일 때는 군인들이 민보단원들한테 철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했어. 누게 명명이라 자기가 살젠 허면 어쩔 수 없었지.”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집단학살의 희생자는 토산1리 주민들이었다. 18세 이상 40세 이하 157명이 이곳에서 집단학살되었다.

“1948년 11월 12일 토산리 금산촌에 거주하는 주민은 바닷가의 토산2리로 철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일제히 이주하여 오막살이나 외양간 등 닥치는 대로 빌고 빌려 주고 해서, 2개 마을이었던 토산 1,2리가 순식간에 1개 마을로 형성되어 云云(중략) 1948년 11월 14일 당시 표선에 주둔해 있던 제9연대와 부수대원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里民들을 향사(里事務所)에 집합시키고 그 중 18세 이상 40세까지 분리하여 밧줄로 포박하고 표선 백사장으로 끌고 가서 죄의 유무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광폭한 군인 한 사나이의 명령에 따라 무참하게 총으로 폭살하고 창으로 도륙하였으니 표선 백사장은 피바다가 되고 진동의 울음 소리는 천지를 울리며 우리 고장의 비극을 알렸고 云云 (하략)”(한라의 통곡 소리, 토산리 4.3사건 실상기)


“표선면 출신의 박남연이라 불리는 경찰이 마을의 살벌한 악덕 보스와 한 패가 되어 표선 가시 성읍과 토산 지방은 ‘게릴라의 소굴이다’라고 날조하고, 토벌대의 선도역으로 되어 토산 지방을 강력히 탄압하고 주민을 손 닿는 대로 체포하여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 그 악랄한 고문을 참지 못하고 1명의 청년이 감시의 눈을 피해 민가의 옥상에 숨어 올랐다. 그는 추적해 온 경찰을 지붕에서 찔러 떨어뜨리고 지붕이 닿는 고해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주인이 죽창을 가지고 ‘즉시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토벌대에 통보한다’고 위협했다. 그것에 울컥한 청년은 창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도주했다. 그것이 부락민 대량학살의 동기라고 한다. 그 날 100여명의 토산리 청장년(16세부터 40세까지)은 염주처럼 꿰어져 표선면의 모래구덩이로 연행되었다. 1열 2열 3열로 나란히 세워지고 기관총과 소총의 일제 사격이 시작되었다. 모래구덩이를 뒤덮은 피의 흐름, 총성에 뒤섞여 절규하는 어린애와 부인들의 소리. 주도면밀히 계획된 학살에 마을 사람들은‘앗’하는 사이에 몰살되었다. 그리고 본보기를 위해 거기에 널려졌다.”(잠들지 않는 남도)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경진압작전 당시 토산리는 진압군의 주목을 받지 않은 마을이었다. 알토산(토산2리)은 해변마을이고, 웃토산(토산1리)이라고 해봐야 직선거리로는 2.4㎞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월 다른 지역 중산간 마을에 내려진 소개령도 이 마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2월 12일 군인들은 어쩐 일인지 웃토산 주민들에게 알토산으로 소개하도록 명령했다. 소개는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진행됐다.

웃토산 주민들은 알토산 주민들의 집 마구간 등에 얹혀서 살았다. 그런데 소개 직후인 12월 15일 밤 느닷없이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두 향사(현재 토산2리사무소 인근)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분리했다. 또 여자들에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20세 미만의 젊고 예쁜 여자들을 분리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당시 수용소였던 표선국민학교로 끌고 가 감금했다. 이후 남자들은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했다. 여자들은 몹쓸 짓을 당한 후 며칠 뒤에 같은 곳에서 희생됐다. 이 기간 목숨을 잃은 토산리 주민만 200여명에 달한다.

당시 토산리는 200호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날 이후 토산리는 청년이 없는 마을이 됐다. 토산1리에 살다가 토산2리로 소개되었던 정의문씨(2018년 88세)의 경우 운 좋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나이는 18살이었지만, 호적 나이로 16살로 돼 있어서 다행히 살았어. 우리 작은 형님도 운 좋게 살았지.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 당시 소개돼 살고 있던 마구간에서 안 나갔거든. 군인들이 죽창으로 툭툭 치면서 나오라고 해도 ‘곧 죽을 거’라고 하니깐, 그냥 내버려 두더라고. 그래서 살았어.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우리 큰형님만 20대라는 이유로 죽었지.”(제주新보 2018.01.14.)


또 세화1리 청년들이 12월 17일 토벌 가자는 군인의 명령에 따라나섰다가 한꺼번에 16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대규모 집단총살뿐만 아니라 간간이 한두 명이 끌려나와 총살되는 등 표선면사무소에 군부대가 주둔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총살이 집행됐다. 또 이곳은 모래밭이 널리 펼쳐 있어서 특정한 곳에서만 총살집행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모살 이곳저곳에서 총살이 집행됐다.

성읍리의 남로당 간부 조몽구 趙夢九(1908년생. 일제강점기 성읍리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 항일노동운동가.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반일투쟁으로 동맹휴학을 선동하여 퇴교 처분을 받았다.

21세 때인 1928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중퇴하였다. 이후 오사카의 공장 노동자로 있으면서 오사카 조선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줄곧 항일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에는 일본 내의 조선노동조합총동맹을 비롯한 조선인 조직과 일본공산당 및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와 같은 일본인의 조직에 참여해 활약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제주인들이 많았었다. 김문준, 김달준, 조몽구, 강규찬, 현호경, 김용해, 강창보, 송성철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 중 조몽구는 김문준의 뒤를 이어 1931년 全協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1년 7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징역 5년으로 감형되어 토쿠시마(德島)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다가 해방 직후 출소하여 제주도로 강제 송환되었다. 해방 후 제주도에서 제주도 인민위원회 표선면 위원장,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의 조직부장,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9월 10일에는 제주도(濟州島)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실무간부 격인 상임집행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장투쟁에 반대했지만 뒤에 한라산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48년 8월 제주도를 탈출하여 북한으로 넘어갔다.

6·25 전쟁 때 남한 출신 의용대장으로 남파되었다가 부산에서 활동 중 1951년 9월 제주도경찰국 사찰과 경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1953년 3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고향 성읍리로 돌아와 살다가 1973년 12월 15일 사망하였다. 형 조범구는 광복 후 초대 표선면장이다.)의 처와 어린 자식들도 여기에서 총살됐다.


표선해수욕장 서쪽에 펼쳐진 모래밭인 한모살 인근에 지금은 표선민속촌과 표선면도서관이 들어섰다. 당시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곳은 도서관 입구의 공터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모래 위에 흙을 복토하여 안내판만 세워져 있다. 2005년 4월 〈찾아가는 위령제〉 네 번째 위령제를 이곳에서 지냈다.

《작성 130215, 보완 1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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