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송담천 전투의 현장(?)..삼양3동 송담천(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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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송담천 전투의 현장(?)..삼양3동 송담천(추정)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2.23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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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경 부대는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삼양3동 송담천(추정)

 

위치 ; 제주시 삼양동 화북주공 동쪽 하천. 현재 이름 삼수천
유형 ; 전적지
시대 ; 고려

삼양3동_삼수천스카이뷰
삼양3동_삼수천

 

1270년 9월에 고려조정에서 파견된 영암부사 김수와 시랑 고여림 등의 관군과 동년 11월에 이문경이 이끈 삼별초군이 명월포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진도 공격에 앞서 삼별초가 진도에서 패전한 후 탐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원종11년(1270) 9월에 영암부사(靈巖副使) 김수(金須)에게 방위군 200을 주어 탐라를 수비하도록 했다.

이어 장군 고여림(高汝霖)에게도 군대 70명을 주어 탐라 수비에 가담하도록 했다. 그들은 탐라 수비를 위해 도민을 동원하여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도 관군이 탐라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이문경(李文京)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문경은 관군을 전멸시키고 명월포에서 조천포(朝天浦)까지 교두보를 확보하고 탐라를 지배했다.


이 전황에 대하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원종 11년 11월조에는 〈적이 제주도를 공격하니 김수와 고여림 등이 힘껏 싸우다 전사하였다. 나주 사람 진자화가 적중에 들어가 그 장수 곽연수를 죽이고 나왔다. 다시 들어가서 그와 같이 하니 사졸이 기뻐서 뛰었다. 조금 뒤에 다시 들어갔다가 적에게 살해되니 적이 이긴 기세를 타서 관군을 모조리 죽였다.〉고 하였으며 승리한 이문경은 수륙교통의 요지인 조천포에 웅거하게 되었다.


그러면 관군이 이 싸움에서 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졸고천백》에 의하면〈김수는 군사를 선발하여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 고여림과 회동하였는데 적은 진도를 지키며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이에 밤낮으로 보루를 축조하고 병기를 설비하여 진도의 삼별초가 내습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으나 현지 방어군이 머뭇거리면서 협력하지 않아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지 못하였다.

김수는 평소 대의로써 사람들을 독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동하고 용기도 백배하였다. 싸움에 임하여 적의 선봉을 거의 섬멸하였으나 현지 주민들이 적을 도왔으므로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여림과 함께 적진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제주도지 제1권 734~735쪽)


이 싸움에서 이문경 부대는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이 싸움을 송담천 전투라고 한다.

송담천이 지금의 어느 하천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제원은 주 동쪽 9리, 송담천은 주 동쪽 13리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북주공아파트 동쪽에 있는 삼수천이다.

제주목관아에서 동제원 터인 오현고 앞까지의 거리 9리는 현재 3.6km이다. 이 비례로 계산하면 13리는 4.2km가 된다. 제주목관아에서 삼수천까지의 거리는 5.5km이지만 중간에 하천이 없으므로 삼수천을 송담천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이 내는 화북1동과 삼양2동, 삼양2동과 삼양3동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삼수천은 동네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둠벵이내’이다.

억지일지는 모르지만 이 이름은 ‘屯兵’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1954년 출간된 프린트판 인쇄물로 담수계(淡水契)에 의해 쓰여진 『역주증보탐라지』에는 부록천이라고 비정했다.

부록천은 화북2동에 속하는 거로사거리 동쪽에서 화북천으로 흘러가 합류하는 소하천이다. 어떤 근거로 부록천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작성 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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