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중국 한(漢)대 거울과 칼, 화폐 등 다량 출토.. 건입동 산지항유물출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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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중국 한(漢)대 거울과 칼, 화폐 등 다량 출토.. 건입동 산지항유물출토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3.0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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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 동북아시아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 갖고 있었다

건입동 산지항유물출토터

 

위치 ; 제주시 건입동 984-56번지 일대
시대 ; 탐라국시대(일본강점기 1928년 발견)
유형 ; 선사유물산포지

산지항출토화폐(디제)
건입동_산지항유물출토터&건입포터표석

 


중국 한(漢)대의 거울과 칼, 화폐 등이 다량 출토된 자리이다. 이들 유물은 1928년 산지항 축항공사를 위한 암석 채취 중 우연히 부근의 용암(熔岩) 아래 한 동굴에서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오수전(五銖錢)은 4점, 화천(貨泉) 11점, 대천오십(大泉五十) 2매, 화포(貨布) 1매 등 총 18매였다. 이 유물들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Daum전문자료)


무게가 5수(銖:약 3.19g)가 나간다는 오수전은 지름 2.51~2.62㎝, 구멍크기 0.92~0.99㎝, 두께 0.12㎝, 무게 2.71~3.0㎏이다. 이 화폐들은 발행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유적의 연대 추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이 화폐가 출토된 유적의 연대는 기원 1세기대로 비정된다. 이 화폐들은 당시 중국에서 시장 경제 수단으로 실제 유통된 화폐로서 이들이 중국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중국 문물의 파급을 의미한다.

제주도에서 출토된 이러한 유물들은 기존에 제주도와 한반도와의 교류에 더하여, 중국을 기점으로 하는 동방 교역로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제주도에 유입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기원전 100년~기원후 500년경부터 건입포가 바다 입출항의 포구로서 제주 사람들에게 이용되기 시작하고 외부와의 교역에 있어 대표적인 포구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이 중 동경 1점은 테두리 폭이 넓은 평연경(平緣鏡) 형식의 중국 한경 파편이며, 다른 1점은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을 모방한 방제경이다. 전자는 중국 제품이지만 후자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내행화문경은 황동색을 띠며, 크기는 지름 7.6㎝, 두께 0.2㎝로 소형이다. 이 동경은 폭 1㎝의 주연이 있고 그 안에 비스듬하게 그어진 선문대(線文帶)가 장식되어 있다. 주 문양대는 내행십과문(內行十瓜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평연경편은 백동색이며, 크기는 복원 지름 9.5㎝, 두께 0.5㎝이다. 평연의 안쪽에 비스듬하게 그어진 연속 평행선 문양대가 있다. 이러한 방제경은 영남 지방에서 1세기경의 청동 유물과 함께 출토된 바 있다.


동경은 구리에 주석, 아연 등을 섞은 합금으로 만든 거울이다.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역사 시대에도 그 모양과 형태를 바꾸어 가며 만들어졌다. 얼굴을 비추는 면은 반질반질하게 만들었고, 뒷면은 꼭지를 달거나 여러 가지 무늬 및 길상어 등을 새겨 장식하였다.

중국에서는 4,000여 년 전 제가 문화 시기부터 거울이 등장하고, 전국 시기에 성행하였다. 한국의 경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세형 동검 등과 함께 나오는 세문경은 얼굴을 비추는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제례 의식과 관련된 의식용 도구로 해석된. 검·경·옥 등은 권위의 상징으로 최고 신분층의 소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철기시대 이후 역사 시기에 들어와 중국 계통의 거울, 특히 한나라 거울이 들어오면서 영향을 받아 다양한 거울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오수전은 전한 무제 때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화천·대천오십·화포 등은 모두 왕망 때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산지항 부근 유적의 성립 시기는 왕망 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할 수가 없다. 다만 경상남도 김해 패총이나 전라남도 군곡리 패총, 그리고 일본의 북구주 지방에서 화천이 발견되었던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산지항 출토 유물은 대륙으로부터 금속기 문화가 남진(南進)해 온 경로를 유추해 볼 수가 있다.


그 유전(流傳) 시기는 왕망 때 만들어진 화천·대천오십·화포 따위가 후한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후한 초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오수전은 마산 성산 패총, 한경편(漢鏡片)은 고성 동외동(東外洞) 패총에서 각각 발견된 예로 보아 당시 제주도 토착인들이 주로 이들 지역과 교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화천은 김해 회현리 패총, 여천 거문도 유적, 낙랑 토성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화천은 네모난 구멍의 오른쪽에 〈貨〉, 왼쪽에 〈泉〉자가 새겨져 있다. 중국 화폐가 발견된 지역의 공통점은 서남 해안을 잇는 해로교통상의 요지라는 점이다.

염사치 설화에서도 염사치가 중국 군현의 관리와 함께 진한으로 되돌아올 때 큰 배를 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중국 군현이 삼한 지역에 왕래할 때 육로보다는 선박과 해로를 많이 이용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중국제 유물은 당시 동북아지역의 교역, 교류관계뿐만 아니라 해당유적의 형성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김해시 홈피, 이야기한국고대사 109쪽)


한편,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단검(短劍), 장검(長劍), 철부(鐵斧) 그리고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출토 유물들은 실제 전투용의 무기들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자기의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위신재(威信財)라는 성격을 갖는다.

출토된 물품들의 시기는 같이 동반되는 중국 제품으로 추정되는 40여 점의 유리구슬들로서 보아 전한대에 해당된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출토된 물품들 또한 적어도 기원후 1세기경 제주도 지배 세력이 한반도를 경유하거나 직접 중국과 교역해서 들여온 것이다.


이 시기 제주도는 탐라국시대에 해당된다. 탐라국이 국내외 사서에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문주왕2년(476) 백제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는 데서이다. 그 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의종16년(1162)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는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는 각각 7회와 19회 정도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의 중앙 관위인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다. 이 사실은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 구조가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것을 종주적 위치에 있는 백제라는 해외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 유물은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당시 제주의 주호가 중한(中漢)과 교역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고종 인덕2년(665년)조에 신라·백제·탐라·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세기라는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인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으려고 했을 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인 적대국들 중 제4위에 속하였다. 따라서 당시 신라 당국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하겠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평연경(平緣鏡)=가장자리가 편평한 거울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동경(銅鏡)의 일종으로, 거울 뒤에 반원고형을 연환상(連環狀)으로 두른 연꽃무늬가 있다. 중국 전국시대의 연고문경이 발전하여 주로 후한 시대에 만들어졌다. 연호문경이라고도 한다.
방제경(倣制鏡)=중국 동경(銅鏡)을 모방해 자체 제작한 거울들. 이런 동경을 한식경(漢式鏡), 혹은 방제경(倣制鏡)이라 한다.
《작성 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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