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참되게, 슬기롭게, 굳세게’(교훈).. 대서리 추자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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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참되게, 슬기롭게, 굳세게’(교훈).. 대서리 추자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8.06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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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 제주군으로 귀속되었다

대서리 추자초등학교

 

위치 ; 추자면 대서리 31번지(대서3길10)
시대 ; 일제강점기(1925)
유형 ; 교육기관

대서리_추자초&체육관 원경

 

대서리_추자초등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에 대하여는 명확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863년에 작성된 ‘모연문(募緣文;제주교육박물관 소장)’에서 추자도 주민들이 학교를 세우고자 열망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글 뒤에는 사람들의 이름 아래 몇 전(錢)이라고 기부금액을 적어놓았는데, 계해년에 시작해서, 을축년, 병인년까지 계속된 모금 사업은 당시 추자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지방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전라남도의 여러 지역과 섬이름 등도 적혀 있어서 섬들끼리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연대하고 부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우리 민족의 교육열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학교 이름은 ‘觀海齋(관해재)’라 했었는데 정확히 몇 년도에 설립되었는지, 또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 그 운영 방법이나 내용을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서는 알 수가 없고, 그 후에 ‘日新齋(일신재)’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994년 제주도교육청이 펴낸 「제주의 서당교육」에 의하면 추자지역에서도 1900년대 중반까지 서당교육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빗겐이서당(1930~1932년) : 1030년~1932년 훈장 김여천이 마을 초가를 이용해 서당을 베풀었으며 학동수가 약 30명에 이르렀다고 함.
• 무명서당(1936~1942년) : 1936년~1942년 훈장 김만수가 초가 3간 집 방 1개에서 학동 약 20명을 모아 가르쳤다고 함.


• 한아지서당(?~1936년) : ?~1936년 훈장 김보백이 초가 3간 집 방 1개에서 학동 15~20명에게 교육을 실시했다고 함.
• 묵리서당(?~1932년) : ?~1932년 훈장 김보백이 초가 3간 집 방 1개에서 서당을 개설하였는데 학동 약 10여명이 교육을 받았다고 함.


• 무명서당(?~1938년) : ?~ 1938년 훈장 오수태가 초가에 방 1개를 이용하여 서당을 열었다 하는데 학동이 무려 30~40명에 이르렀다고 함.


추자도의 교육에 있어서는 유배인들의 역할도 있었을 것이다. 유배되었던 인물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주민들에 대한 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실명이 전해지는 유배인들은 다음과 같다.


• 1865년(고종 2) 박준갑이 유배된 뒤 허물어진 최영 장군 사당을 개축 ․ 보수하였고, 서당을 지어 교육하였다고 하며, 1870년(고종 7) 9월 10일 유신 정만식이 종신 유배의 형을 받아 노모를 모시고 하추자 묵리에서 적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극진하여 행동으로 예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 1876년(고종 13)에 이조판서 조병창은 3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현지 주민 2~3명을 종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상례법과 한문을 가르쳤다.


• 1883년(고종 20)에는 유신 김동혁이, 1893(고종 30)에는 승정원 승지 안효제가, 1896(건양 원년)에는 홍우덕과 임녹길이, 1898(광무 2)에는 박명환이, 1901년(광무 5)에는 무관 길영수가 각각 유배된 기록이 있다.

1899년(광무 3)에는 재상 김세제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대서리에 양정의숙이란 서재를 창설하여 청년들에게 한학문과 예절을 가르쳤다 하며, 같은 해 유제보가 15년형을 받고 들어와 서당을 운영하였다고 한다(「제주의 섬」 168~169쪽).


일제강점기에는 상추자에도 일찍이 개량서당이 개설되었으나 1925년 9월 추자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폐숙되었다.


추자도에는 노동야학도 있었다. 노동야학이란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한 야학이다. 당시에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미분화된 단계였기 때문에 이를 노동야학이라고도 칭하였다.


농민야학은 1920년대 중반, 당시 남녀공학이 30%에 해당하였고, 성인교육과 적령 아동교육으로 구분 ․ 실시하였다.


야학소는 종래의 서당이나 큰 집을 빌려서 쓰기도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회관을 건립하여 운영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교원은 지방의 청년이나 학생들이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상설야학으로 운영되면서 농번기에는 여가를 이용한 독서운동을 실시하고 농한기인 11월부터 다음 해 4월경까지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다만 적령 아동의 야학은 연중 실시되었다.


추자도 하도 청년회와 어부들이 협력하여 하도의 4개 마을에 각각 1개소의 야학소를 설치하고 문맹 어민 혹은 미취학 아동들을 교육시켰는데 야학생이 모두 1백여 명에 달하였다(『동아일보』, 1927. 1. 31.). 야학 개설은 당시의 청년회가 주도하였다.


야학이 개설되기 6개월 전 추자무산 소년단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이 추자도에까지 유입되어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것은 민중교육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구축되고 있었다는 징표하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자보통학교는 당시 일본 거류민학교가 있었으므로 구별하기 위하여 한국인이 다니는 보통학교는 관두에 ‘서’자를 첨가하고, 일본인이 다니는 심상소학교에는 ‘동’자를 덧붙여 구별하였다.

그 이유는 동과 남은 동남발복 욱일승천한다고 해서 소위 신흥 일본을 상징하고, 서와 북은 서산 일락 또는 패배 몰락한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추자공립심상소학교는 추자동공립심상소학교로, 추자공립보통학교는 추자서공립심상소학교라 하였다.


추자공립보통학교(현 추자교)는 1925년 9월 개설되어, 수업 연한 4년, 학생 수 117명, 직원 수 4명(한인 3명, 일인 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1941년에는 하추자도에 신양공립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추자도의 공립초등학교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면 추자교는 제2차 조선교육령 적용기에, 신양교는 제3차 조선교육령 적용기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추자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하였다가 1914년 3월 1일 제주군으로 귀속되었다. 1925년 6월 3일 추자공립보통학교를 추자면 대서리 31번지에 설립, 같은 해 9월 1일 개교하였다. 추자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은 추자도에 학교가 세워진 최초의 일이 된다.


추자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학교 설립 과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일신재중수기(日新齋重修記)’ 등 참고 문헌에 의하면, 이 고장은 예로부터 어려운 지역 여건 속에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후손들에게 그 전통을 이어주기 위한 학교 건립에 뜻을 모아 오다가, 신교육 사조가 확산되면서 유신, 친일파 송주성, 김태동, 김상진 3인이 유배되어 영흥리 박치효의 사랑에 적거하면서 대서리에 광흥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에 김상진을, 하추자 묵리에는 개성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에 김덕민을 각각 임명하였는데, 1910년 한일병탄 강제늑약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위의 세 유신들은 서울로 소환되어 가고, 하추자 개성학교는 폐교되었으며 상추자에만 사립학숙식으로 교육하여 오다가 1925년 6월 3일 추자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고 같은 해 9월 1일 4년제 2학급으로 개교하였다.


1926년 일본인 교장 하시즈메가 진도의 고성에서 전입되어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그는 추자보통학교와 바로 이웃하고 있던 일본인 학교 추자심상소학교 교장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한글을 폐지하고 일본어 공부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1938년 추자서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고(추자동심상소학교는 일본인 학교), 1944년 추자서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2월 27일자로 일본인 교육기관이었던 추자동초등학교 교사 부지 일체가 추자서국민학교에 귀속되었고, 1948년 3월 1일 추자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9년 추자국민학교로 개칭하여 내려오다가 1996년 3월 1일 추자초등학교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른다. 교훈을 ‘참되게, 슬기롭게, 굳세게’라고 내걸었고, 교목을 소나무, 교화를 금잔화로 정하였다.
《작성 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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