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세칭 '북촌사건' 학살극 장소.. 동복리 굴왓(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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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세칭 '북촌사건' 학살극 장소.. 동복리 굴왓(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8.08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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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는 그 가족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몰아 학살했다.

동복리 굴왓(학살터)
 

위치 ; 구좌읍 동복리 1351-1번지. 동복분교장에서 남동쪽 길(마을우회도로) 건너에 있는 밭
유형 ; 학살터
시대 ; 대한민국

동복리_장복밭폭낭
동복리_학살터굴왓

 


1948년 10월11일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후임 송요찬 중령)를 새로 설치하여 강력한 토벌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다시 해군함정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11월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1948년 12월29일 제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의 강경 진압작전은 이전의 상황보다 더 고강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동복리는 굴왓 사건에 앞서 1948년 11월 중순에는 동복리 지경 '개여멀'에서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20여명의 군인들이 전사한 사건이 있었다.


또 1948년 12월 22일 구좌면 동복리 '비석거리'에서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토벌대의 총성이 요란하게 뒤섞였다. 교체를 앞둔 9연대의 학살극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이날 희생된 사람은 양봉일(梁奉日, 여, 59, 이명 梁完模) 안행선(여, 57) 김영화(金榮華, 여, 37) 김두일(金斗一, 여, 31) 신월순(愼月順, 여, 12) 신지일(愼枝一, 8) 고봉림(高奉林, 6) 신신자(愼信子, 여, 5) 등이다.

아들이, 남편이, 혹은 아버지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이들이 학살된 유일한 이유였다. 토벌대는 이튿날인 23일에도 아들이 입산했다는 구실로 윤덕연(尹德連, 여, 76)을 총살했다.


동복리 출신으로 무장대 활동을 한 사람은 강아무개, 부아무개, 한아무개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사태가 험악해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은 피신 생활에 들어갔고, 토벌대는 그 가족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몰아 학살했다.


12월 24일, 이번에는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야음을 틈타 기습한 무장대는 동복리 민보단장의 집을 덮쳐 가족들을 죽창으로 마구 찔렀다. 민보단장 김종해(金宗海, 23)는 바닷가까지 도망쳤지만 곧 잡혀 숨졌다. 또 김종해의 동생 김찬해(金贊海, 14)도 희생됐다.


이 사건은 마을을 더욱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가뜩이나 토벌대의 학살극이 마구잡이로 자행되던 터에 무장대 습격사건까지 발생했으니 앞으로의 일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특히 '도피자 가족'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25일 날이 밝자 동생이 입산한 신영우(愼永佑, 51)는 "개죽음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며 목을 매 자살했다. 같은 날 역시 도피자가족인 김순길(여․60)과 그의 아들 양태용(梁泰龍, 30)이 토벌대에게 총살됐다.

이날 양태용의 아내 윤재아(28)는 월정리 주둔 군인들에게 끌려간 후 행방불명됐다. 사태가 이쯤 되자 젊은이가 도피한 집안에서는 목숨을 건 탈출극을 벌였다. 신운갑(愼雲甲, 72)은 아들 신영우가 자결하자 공포에 질린 나머지 26일 산으로 피신하다가 붙잡혀 희생됐다.


이에 무장대의 보복 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무장대는 민보단장을 살해한지 닷새 만인 12월 29일 또다시 마을을 덮쳐 민보단원 김경봉(金庚奉, 42, 이명 김성추) 한기생(韓基生, 35) 송수년(宋洙年, 27)을 살해했다.


2연대가 들어온 후에도 토벌대의 총살극은 계속됐다. 1949년 1월 5일 토벌대는 함정을 팠다. 갈옷 차림으로 민가를 찾아 든 경찰은 "산사람인데 쫓기고 있으니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를 항아리에 숨겨주려 한 강봉욱(康奉旭, 49)․백화일(白花日, 46) 부부와 윤정희(여, 22)가 마을 팽나무 앞으로 끌려나와 총살됐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동복리의 굴왓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1949년 1월 17일 월정에서 함덕리로 이동 중인 군부대 트럭이 북촌리 지역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는 사건이 벌어지자 군인들은 곧바로 인근 마을인 동복리와 북촌리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다.

세칭 '북촌사건'으로 알려진 이 학살극으로 수백 명의 북촌리 주민 뿐 아니라 동복리 주민도 86명이 희생됐다. 동복리 '굴왓'은 4·3 당시 이 마을 주민 86명이 군인 토벌대들에게 집단으로 학살된 장소이다.


이날 오후 4시쯤 북촌 학살을 끝내고 돌아가던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 2대대(함덕주둔) 11중대(월정 주둔) 군인 30여명이 동복리로 몰려와 전 주민들을 장복밭(동복리 836-1번지. 남쪽으로 휘어진 폭낭 있는 밭, 사진上)에 집합시켰다.

11중대는 당시 서청특별중대라고 불려졌는데 인근 주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장 악명이 높았다. 11중대는 무장대와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작전을 바꾼 이승만 정권이 서울에서 서청단원을 모집해 그 해 12일간의 단기 교육을 마치고 제주에 급파한 군인들이었다.


군인들과 김녕의 민보단원들은 동복리 주민들을 연설을 들으러 '장복밭'으로 나오라고 한 뒤 '굴왓'에 집결시켜 주민들을 총살하였다. 희생자 대부분이 남자들이었다.

여자들과 군경가족, 버스운전수, 양민증 소유 9세대를 제외한 18세 이상의 남자들을 전부 학살했다. 민보단원들이 '굴왓'을 에워싸며 경계하고 있었고 M-1 소총, 그리고 기관단총을 걸어 놓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바로 이어 대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했다. 김창송(47)은 굴왓 학살현장에서 일단은 살았으나 재차 확인사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이 현장에서 고계봉, 고태우, 이운태, 신일보 4명이 극적으로 살아나 '굴왓' 학살의 진실을 마을 주민들에게 증언했다.


이와 함께 토벌대는 해변마을임에도 동복리를 소개시켰다. 동복리는 깡그리 불에 탔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경찰지서가 소재한 김녕리로 소개되어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소개지에서의 학살극도 그칠 줄 몰랐다.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김녕지서 옆 밭과 김녕 공회당 앞 밭에서 마을주민 30여명이 차례로 희생되고 만다. 만 1년 동안 김녕에서의 소개생활을 끝내고 1949년 마을로 돌아와 성을 쌓아 솔나무로 오막살이를 지어 고향재건이 이뤄진 것이다.

2백호 가량의 작은 마을에서 제주도의회 4․3특위에 신고된 사망자만도 131명이었다.(한라일보 080108 오승국 글, 제민일보 980320) 당시 학살터였던 '굴왓'은 현재 농사짓는 밭이다.
《작성 1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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