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0가지 덕이 있다는 연꽃.. 하가리 연화못(봉천수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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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0가지 덕이 있다는 연꽃.. 하가리 연화못(봉천수연못)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08.09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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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종자는 100년 이상 간다는 말이 있다.

하가리 연화못(봉천수연못)

 

위치 ; 애월읍 하가리 1569번지. 마을 가운데 큰길가.

유형 ; 수리시설(봉천수연못), 전설유적
시대 ; 고려

 

하가리_연화못

 


하가리는 고려시대부터 화전민이 모여 살다가 태종18년(1418) 현촌 고내리에서 분리되어 가락리로 불리다 세종30년(1448)에 윗동네를 상가락, 아랫동네를 하가락으로 부르게 되었다.

정조22년(1798)에는 상가락이 상가리로, 하가락이 하가리로 개칭되었다. 본래 제주군 신우면 지역으로 가락 아래쪽이 되므로 하가락·하가 또는 아랫더럭·알더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하가리가 되었다.


연화못은 넓이가 3,780여 평으로 봉천수에 의한 연못으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넓다. 연화못은 연꽃이 많은 연못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연화못은 가운데 큰 연못과 남쪽의 작은 연못, 북쪽의 더 작은 연못 이렇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남쪽 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이 보이지 않으며, 북쪽 연못에는 수련이 무성하다.

연꽃에는 10가지 덕이 있다고 한다.


①이제염오(離諸染汚)=진흙탕에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②불여악구(不與惡俱)=연꽃 잎에는 한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도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③계향충만(戒香充滿)=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가 사라지고 향기가 난다.
④본체청정(本體淸淨)=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


⑤면상희이(面相喜怡)=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진다.
⑥유연불삽(柔軟不澁)=연곷의 즐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⑦견자개길(見者皆吉)=연꽃을 꿈에 보면 길(吉)하다고 한다. 또 연꽃을 보거나 그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
⑧개부구족(開敷具足)=연꽃은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 꽃 피운 만큼 열매를 맺는다.


⑨성숙청정(成熟淸淨)=연꽃은 만개했을 때 그 색깔이 곱기로 유명하다. 연꽃을 보면 마음과 몸이 밝아지고 포근함을 느낀다.
⑩생이유상(生已有想)=연꽃은 날 때부터 넓은 잎과 긴 대에 꽃이 피지 않아도 연꽃 임을 알 수 있다.

연화못은 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어 갈수기에는 농업용수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연꽃·수련·소리쟁이·쇠무릎 등과 각종 수생 식물을 비롯하여 어류 등 다양한 종이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연못 서쪽의 동산에는 팽나무가 우거져 있어 한층 더 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연꽃은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32년 제주목사 한응호가 지방 순시중에 이곳에 들어 연꽃잎으로 술을 빚어 마시고 시를 읊었으며 양어머니로 하여금 연꽃을 지켜 가꾸도록 했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제방공사를 한 이후로 연꽃을 포함한 각종 수생동식물 서식지로 바뀌었다. 1976년 혹한으로 연꽃이 동사하여 없어지고 말았으나 2년 뒤 종자로 발아한 연꽃 3포기가 자라서 번식된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항간에는 연꽃이 100년에 한 번식 시집을 가는데 그 때 2년 동안 없어졌던 것은 시집을 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연꽃 종자는 100년 이상 간다는 말이 있다. 한때는 연꽃 외에도 적수련, 백수련, 황수련이 있었으나 지금은 적수련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잉어를 기르게 되자 한 이십 년 동안은 연꽃이 피지 않았다고 한다. 연꽃이 피지 않자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 마을 출신으로 육지에 방직공으로 진출한 처녀들이 연꽃을 사 보내와서 다시 연꽃이 피기 시작하였다.(제주투데이 040517) 한때 이곳은 붕어낚시터로 유명하기도 했었다.


연화못 주변으로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고, 2006년 총 2억 5000만 원의 공사비를 들여 생태 관찰로를 완공하였다. 오래전부터 연화못 가운데는 육각정(六角亭)이 있었다. 과거에는 육각정이 섬처럼 연못의 가운데에 있어 아이들이 수영해서 육각정에 올라가곤 했다고 한다.

구조적 결함을 보인 낡은 육각정을 철거하고 전통 정자 모형의 새로운 육각정을 지었으며, 현재 육각정이 있는 곳에서 기초공사를 할 때 뻘 속에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재와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자와 산책로 사이에 목재 다리도 설치를 했다.


또한 생태 학습장으로서 손색이 없도록 인근에 자생하는 수련 등 수생 식물과 자연 식생 및 민물고기, 양서류, 조류 등을 관찰할 수 있도록 복원되었다. 연못 주변에는 수영, 소리쟁이, 쇠무릎 등 각종 식물과 수서곤충, 양서류, 조류 등 다양한 종(種)들이 서식하고 있다.


하가리에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아름다운 연화못이 고려 충렬왕 때, 현재 연하못은 4형제가 주축이 된 '야적(野賊)들의 집터'였다고 한다. 4형제가 힘이 장사인데다가 성격이 포악해서 야적들은 연못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이 연못에 딸린 작은 못의 하나인 샛물통에는 작은 초막을 지어 살면서 마을을 지나가는 행인들을 농락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신임판관 초도순시가 있을 때 야적들은 판관 일행을 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 마을 뚝할망이 야적들의 흉계를 관가에 알려. 관군이 출동하여 야적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뚝할망이 야적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따라서 관가에서는 뚝할망의 충정심을 기려 벼슬을 내리고 제주향교의 제신으로 받들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움푹 파인 야적의 집터를 소와 말에게 물을 먹이는 못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원래 이곳은 집터였다. 그런데 집터가 사나워서 그랬던지 주인의 심사가 매우 고약하였다. 집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물건을 빼앗고 구타를 하는가 하면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인근의 사람들까지 괴롭혔다. 이를 보다 못한 옆 마을에 사는 장사가 주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리라 마음먹고 그 집 앞을 일부러 지나갔다.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주인은 달려 나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네 이 노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지나느냐? 이곳을 지나려면 세를 내야 하느니 가진 것 모두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하리라."


그러나 마음먹고 한 일인데다 힘이 장사라 집주인은 그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주인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말안장에 매고는 말을 달렸다. 이것을 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집주인을 때려죽이고 집을 헐어 연못을 팠다.


17세기 중엽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하여 지금의 연못으로 탄생되었고, 서남쪽 연못은 식수로 쓰고 큰 연못은 우마 급수나 빨래터로, 나물을 씻는 용도로 사용하며 뚝을 쌓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현장의 안내판, 제주투데이 040517) 2021년에는 연꽃이 모두 죽었다.
《작성 1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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