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근대문화유산 지정, 보호할 가치..월정리 구좌중앙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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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근대문화유산 지정, 보호할 가치..월정리 구좌중앙초등학교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1.09 0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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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과 유리창, 내부 구조 등이 상당히 바뀌었지만 벽은 석조 그대로 유지

월정리 구좌중앙초등학교

 

위치 ; 구좌읍 월정리 100번지.
유형 ; 교육기관(초등학교)
시대 ; 일제강점기

월정리_구좌중앙초등학교 석조건물
월정리_구좌중앙초등학교

 

구좌읍 월정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일제강점기 구좌면 주민들의 교육열의는 매우 높았으며 한문을 위주로 가르치던 서당교육 이외에 한자와 신학문을 병행하여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학사(學舍)가 설립되었으며 월정과 행원리에도 각각 진명학사(普明學舍)와 영신학사(永信學舍)를 설립하여 후세 교육을 위한 노력을 해왔다.


1908년 구좌면 제2대 면장 이원화(李元華)가 당시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주로 했던 교육방침을 개선하여 國語, 算述 등 신학문을 교육하는 2년제 면학교를 행원리에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구좌면사무소가 한동리로 옮기면서 평대리로 이설하였다.

운영비는 리에서 부담했으며, 머리를 깎아 입학하는 것을 꺼려 입학 학생이 많지 않았고 운영비 조달에 어려움이 있어 2회의 수료생을 배출하고 폐설되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1922년 2월 4일 칙어 제19호로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는데 1面 1校 개설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 때 각 읍·면마다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월정리, 행원리, 김녕리, 하도리에서 공립학교 유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월정리와 행원리에서도 당시 제주도 行政主任 鎭金錫(월정리), 당시 제주경창서 순사부장 洪淳均(행원리) 두 분이 중심이 되어 월정리 곽주술(취락구조 개선마을 위치)에 학교 부지를 정하고 공립학교 설립추진을 하였으나 1923년 김녕리가 먼저 공립학교 설립 인가를 받게 되자, 사립학교를 추진하였다.


1923년 9월 1일 4년제 사립 중앙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아
1924년 5월 10일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4년제) 실시된 교육 과목은 사립학교일지라도 일본의 감시하에 산수, 국어(일본어), 조선어, 일본역사, 지리, 화도, 창가, 체조, 가사재봉 등이었다.


1930년 5월 30일 6년제로 인가되었다. 6년제 교과는 산수, 국어(일본어), 조선어, 산술, 지리, 도화, 창가, 체조, 이과, 조행(操行) 이었는데 초등보통교육은 국어(일본어)와 일본역사를 중점적으로 지도하였다.


1938년 3월 31일 사립중앙심상소학교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이후부터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교수 용어를 일본어로만 가르치도록 하였다.


1941년 3월 31일에는 사립중앙학교로,
1946년 3월 31일에는 구좌중앙공립국민학교로,
1950년 5월 31일에는 구좌중앙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76년 10월 6일 도서관을 신축하였다.
1981년 3월 10일 병설 유치원이 개원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구좌중앙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1년 3월 1일 유치원 교실을 준공하였다.
2004년 2월 18일 운동장에 잔디를 조성하였다.
2014년 2월 14일 제90회 졸업(8명), 총 4283명


구좌중앙초등학교 졸업생으로 김인배(金仁培, 1회)는 독립운동을 하다 1930년 징역 5년을 선고받아 복역중 옥사하였다. 신창진(神昌珍, 2회)은 제주농업학교 학생 제 1차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안치현(安致賢, 1934년 졸업)은 일본 가라후도의 탄광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펀치볼 전투의 영웅 고태문 중위도 1941년 구좌중앙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구좌중앙초등학교 누리집,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구좌중앙초등학교)

이 학교의 동쪽 교실 연혁을 보면 1958년 12월 30일 4개 교실과 현관, 승강구를 신축(석조, 스레트, 1층, 96평)했으며 이어서 1961년 1월 30일 3개 교실과 승강구를 증축(석조, 스레트, 1층, 76.6평)하여 7개 교실을 갖추게 되었다.

1991년에 들어 3개 교실을 부분 철거하였고 나머지 4개 교실 규모는 1993년에 개수하여 급식실과 과학실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과 유리창, 내부 구조 등이 상당히 바뀌었지만 벽은 석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작성 141228, 보완 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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