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생계 유지, 자급자족형·정착형의 성격.. 광평리 화전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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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생계 유지, 자급자족형·정착형의 성격.. 광평리 화전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2.1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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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취락들은 제주도의 생활 공간을 한라산지 내륙으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광평리 화전마을터

 

위치 ; 안덕면 광평리 병악에서 상천리 일대와 색달동 모라이악 서쪽 지역
유형 ; 옛마을터
시대 ; 조선시대 후기

광평리_화전연못
광평리_화전밭담


[개설]


서귀포시의 화전취락은 중문동·동홍동·안덕면·남원읍 일부 지역에 있었다. 화전취락은 해안 지대와 산록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주민들과 한반도에서 유입된 화전민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들은 삼림이 무성하여 토지 소유권 행사가 소홀했던 한라산 산록대의 자연 초지 또는 이보다 더 위쪽에 위치한, 해발고도 350~600m의 삼림지를 불태운 다음, 화전농을 하면서 화전취락을 만들었다.

서귀포시를 비롯한 제주도의 화전취락은 일시적인 도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생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자급자족형·정착형의 성격을 띠었다.


[연원]


19세기 말부터 그 동안 농경이 금지되었던 목장 지대 내의 삼림지에서 화전이 허용된 결과 화전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고종32년(1895)경부터 공마제도를 폐지하면서 국영 목장을 방치하기보다는 목장 내에서의 화전 경작을 허용하는 대신에 화전민들로부터 화전세를 거두어들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목장토를 이용한 화전 경작이 점차 확산됨에 따라 화전민과 화전촌이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화전민에게 부과되었던 화전세 징수 과정에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이들과 화전민 간의 마찰이 빈발하여 마침내 1898년에는 화전민 방성칠(房星七)이 주동이 되어 민란[방성칠의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화전민의 저항은 화전민의 양적 팽창과 화전농이 번성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변천]


서귀포시의 화전취락은 총 다섯 곳이 있었다. 중문동 녹하지악 서쪽과 동쪽(해발500~600)에 있는 화전동(火田洞), 동홍동 미악산 일대(해발 500)의 화전동, 안덕면 상천리와 광평리 병악~모라이악 일대(해발 400)의 화전동, 남원읍 한남리 산간 지역 거린오름~사려니 일대(해발 350~400)의 화전동 등이다. 서귀포시를 비롯한 제주도의 화전취락은 4·3사건 때 산간마을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들 화전취락들은 제주도의 생활 공간을 한라산지 내륙으로 이동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화전취락은 제주도의 상한(上限) 취락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광평리 병악으로 오르는 길에는 화전 밭담, 화전민이 이용했던 연못 등이 남아 있다. 집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작성 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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