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납읍리 김용징(金龍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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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납읍리 김용징(金龍徵)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07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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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납읍리 김용징(金龍徵)비

위치 ; 애월읍 납읍리 2787번지(이 번지는 도로를 포함하는 공유지이다.) 납읍리 1726-1번지의 서쪽 도로변(납읍로20의 맞은편)에 있다.
시대 : 일제강점기(1935)

 

납읍리_정헌김선생비

 


김용징(金龍徵)은 조선 후기 문신‧교육자‧서예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로 순조9년(1809) 부친 김봉철(金鳳喆)과 모친 남양홍씨 사이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납읍리 1643번지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제주입도조 김만희의 17세손이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정헌(靜軒)이다. 동생으로 김상징(金象徵)과 김기징(金驥徵)이 있다.

인정이 많은 성품을 타고났으며, 총명함까지 갖추어 6세에 이미 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다. 7세 때에는 금산 앞밭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여러 집안 어른들 앞에서 삵쾡이를 보고 크게 놀랐다고 말하였다. 부친이 그 말을 글로 써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云大哉此 狸形瞋目 樊噲將軍(운대재차 이형진목 번쾌장군)이라 쓰니 보는 사람이 모두 감탄하였다고 한다.

정헌유고문집 『도유대연헌』에 따르면 8세에 외숙부 청암 찰방 홍달훈의 소개로 고향을 떠나 전북 부안의 명유(名儒)를 찾아가 15년간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등 사서삼경과 서예, 시, 부(賦) 등의 학문 수학(修學)에 진력(盡力)하였다.

순조32년(1832)에는 전주(全州)에서 열린 소과(小科) 초시의 하나로 시험에 합격하면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승보시(陞補試)에 합격하였으며, 헌종4년(1838)에는 제주의 승보시(陞補試)에도 합격하였다.

또 35세인 헌종9년(1843) 계묘 식년 진사시 3등에 58위로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제주도에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제주향교(濟州鄕校), 정의향교(旌義鄕校), 대정향교(大靜鄕校)가 있었는데, 그는 향교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철종5년(1854)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 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내에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의 아버지를 제사 지내기 위하여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자 그는 제액(題額)을 써서 사당에 걸어두었다. 당대 제주 최고의 학자로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시켰으며, 학식(學識)이 매우 풍부하고 글씨 또한 잘 써서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을 들었다.

최익현(崔益鉉)의 『면암집(勉菴集)』 부록(附錄)의 연보(年譜)에는 김용징 관련 기록이 보인다. 유배당한 최익현은 고종10년(1873) 12월 3일 70리 뱃길을 거쳐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도(所安島)에 도착하였는데, 유배지에서 교유한 문사(文士)들로 안달삼(安達三), 김희정(金羲正), 강기석(姜基碩), 김용징(金龍徵), 김훈(金壎), 김치용(金致瑢), 김양수(金養洙)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가 최익현과도 교유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27년(1890)에 납읍리에서 졸하였다.

비석(成均進士靜軒金先生碑)은 1935년 문하생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嗚呼 生三事 一 臣爲君 子爲父 弟子爲尊師 固人之常道也 先生純祖壬辰赴全州 陞補入格 翌年覆試 戊戌初抄陞再抄陞 癸卯式進士第三等 榮歸本第養親之誠 無復榮進之義 每每智牧初涖 訪問南州高士 則以先生 先薦九次本校敎授兼三校敎授 啓聖祠額題位板 皆先生手書也 終日端坐如春風溫和 晧月揚輝 噫 學之者雖存 而知者鮮 知者雖存 而得之者鮮矣 先生之均四十有六年 先進高弟十存 一二三州章甫慕尊師之義 以罔不朽之名 修其言其行又有肖孫悠揚 可以知其傳之不失 復有何恨哉
門生 承士 邊之悅 掌令 金命岳 進士 金星昊 鄕解 金性燦 姜承齊 監察 文斗天 鄕解 梁達河 宋之玉 張仁壽 進士 金箕樞 敎授 梁之權 梁在權 鄕解 金致元 金國樞 金時行 兪晟煥 文京天 秦承浩 進士 姜承模 鄕解 姜賢模
三校 直員 金翊洙 姜鐵鎬 姜鶴瑞 本面掌議 邊旼燦 秦無八 高英貴 姜鉉權 洪淳奎 秦性琨 金時鐘 金炳玹 發起 宋斗禾 高瀅奎 金彦基 邊德九 金胤祚 謹撰 敎員 張聖欽 謹書 文斗昇 謹鐫
孔子誕降 二四八六年 四月 謹竪

〈오호라 사람은 태어나 평생 3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며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다. 선생은 순조32년(임진년, 1832) 전주에서 시행한 승보초시에 입격하고, 다음해 복시에도 입격하였다.

또한 헌종4년(무술년, 1838) 제주 승보 초시에, 헌종7년(신축년, 1841) 승보복시에 또 다시 입격하였다. 헌종9년(계묘년, 1843) 진사 시험에 3등으로 영예롭게 합격하고 귀향하였다. 제주에서 양친이 차례로 돌아가자 치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그 때마다 제주목사가 부임후 맨 처음 문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선생은 향리에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은 고매한 학자(南州高士)로서 먼저 천거받아 9차에 걸쳐 제주향교 교수 겸 정의·대정 3향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선생은 철종4년(1854) (목인배 목사가 제주향교에 계성사를 창건할 때) 계성사 현판을 쓰고 직접 게시하였다. 선생이 하루종일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봄바람이 불 듯 온화하고 밝은 달빛 같다고 찬양하였다.

학문을 수학하다가 하품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학문을 하는 자는 새롭고 신선한 것을 깨닫는 자라고 하였다. 비록 알고 있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자가 학문을 터득하는 진정한 학자라고 하였다. 선생은 성균관에 입교하여 40세까지 6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 당시 성균관에서 높은 선진 학문을 연찬한 자가 10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선생의 문장과 글은 전국 123개 주에서 올라간 성균관 유생 가운데 으뜸으로서 스승을 존경하고 사모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선생이 남긴 그 불후의 시(詩)와 부(賦)의 명작이 없어지지 않도록 그 말씀과 행동을 하나하나까지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생이 몸소 실천한 품행은 후손들이 본받아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실되지 않고 계속 전해져야 함은 물론 어찌 유실된 후 복원하려면 이미 때는 늦어 후회만 할 따름이다.

선생의 문하생으로는 승사 변지열 장령 김명악 진사 김성호 향해 김성찬 강승제 감찰 문두천 향해 양달하 송지옥 장인수 진사 김기추 교수 양지권 양재권 향해 김치원 김국추 김시행 유성환 문경천 진승호 진사 강승모 향해 강현모 등이 있다. 제주의 3개 향교 직원(현재의 전교) 김익수(제주) 강철호(대정) 강학서(정의) 본면(애월면) 장의 변민찬 진무팔 고영귀 강현권 홍순규 진성곤 김시종 김병현이 발기하였고, 송두화 고형규 김언기 변덕구 김윤조가 삼가 비문을 지었으며, 교원 장성흠이 글을 쓰고, 문두승이 삼가 새기다.〉(해석 김태국)

비석의 크기는 높이 92㎝, 너비 41.5(아래)∼44(위)㎝, 두께 20㎝이다. 우진각 기와 지붕 모양을 새긴 가첨석은 가로 66㎝, 세로 54㎝, 높이 27㎝이며, 비석을 받치고 있는 방부는 81㎝, 50.5㎝, 24㎝이고, 가로 74㎝, 새로 38㎝, 높이 14㎝인 상석이 앞에 놓여 있다. 가로 440㎝, 세로 390㎝, 높이 100㎝의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다.
《작성 1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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