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문장 뛰어나고 복술(卜術)에 능통..신도3리 변경붕묘
상태바
[향토문화] 문장 뛰어나고 복술(卜術)에 능통..신도3리 변경붕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08 07: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정향교 명륜당(明倫堂) 편액, 순조11년(1811) 당시 대정현감 변경붕이 주자의 글씨 본떠 쓴 것

신도3리 변경붕묘
 

위치 : 신도3리 838번지
시대 : 조선후기
유형 : 묘

 

 

신도리_838 변경붕묘구비

 

신도리_838변경붕묘


대정읍 신도리 출신의 문신 변경붕(邊景鵬)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만리(萬里), 호는 일재(一薺). 부친은 성휴(聖休)이고 조부는 시해(是海)이며, 증조부는 희련(希蓮)이다. 외조부는 오계희(吳繼姬), 처부는 김구적(金龜迪)이다.

그의 집안은 종조(從祖)였던 변시중(邊是重)을 비롯하여, 변성운(邊聖運)·변성우(邊聖遇), 삼종형(三從兄)인 변경우(邊景祐) 그리고 변경붕(邊景鵬) 본인을 합하여 18세기에만 5인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과 입격자가 적었던 제주 지역에서 그의 가문에 학문적 풍토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학(修學)과 과거 응시 : 변경붕은 영조32년(1756) 현 서귀포시 중문동(中文洞)에서 태어나 후에 대정현(大靜縣) 신도리(新桃里)로 이주하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난 변경붕은 10살 이전에 천자문과 사략을 익혔고, 11살부터는 김명헌(金命獻)에게 수학하면서 『통감절요(通鑑節要)』·『시경(詩經)』·『서경(書經)』·『당음(唐音)』 등을 배우면서 제술(製述)에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21세에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들어가, 목사가 주관한 일과(日課)에서 시로 세 차례 장원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24세였던 정조3년(1779) 향시(鄕試)를 통과하고 한양에 가 복시(覆試)를 치렀으나 낙방하여 제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향교의 장의(掌儀)직을 수행하다가 정조5년(1781) 안핵어사(按覈御史) 박천형(朴天衡)이 제주에 와 시행한 시재에 응시하였는데, 삼종형인 변경우(邊景祐), 표해록(表解錄)을 쓴 장한철(張漢喆), 김경회(金慶會) 3인만이 입격하고 변경붕은 낙방하였다.

이듬해 봄과 겨울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게 된다. 정조14년(1790)에는 36세의 나이로 향교 훈장이 되어 4년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변경붕은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의 꿈을 접지 못하고 제주 지역에서 치러진 문과 식년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하였다.

문과 급제와 탐라빈흥록 : 정조18년(1794) 제주위유안핵순무시재어사(濟州慰諭按覈巡撫試才御史) 심낙수(沈樂洙)가 도임하여 제주시재(濟州試才)가 치러지게 되었고 변경붕도 응시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그의 문집에 의하면 이 날 시험이 제주에 과장이 열린 이래 가장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제주 각지에서 많은 유생들이 시재를 치르려 몰려들었다 한다.

이 문과시재에서 7명이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입격자를 배출하였는데, 당시 입격자는 홍달훈(洪達勛)·이태상(李台祥)·고명학(高鳴鶴)·부종인(夫宗仁)·정태언(鄭泰彦)·김명헌, 그리고 변경붕이었다.

정조는 지방에서 시재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과 작품을 함께 인쇄하여 반포하는 관례에 따라 제주 지역 시재 입격자의 작품을 모은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을 제작, 반포하였다. 이듬해인 정조19년(1795) 변경붕은 식년(式年) 전시(殿試)에 제주직부(濟州直赴)로서 문과에 급제하게 된다.

이후 변경붕은 봉상시(奉常寺),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대정 현감(大靜縣監), 만경 현령(萬頃縣令), 연서 찰방(延曙察訪),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의 내외 관직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까지 이른다.

현감 재직과 공덕비 : 변경붕이 문과에 입격할 당시 제주는 1794~1795년의 흉년으로 그 참상이 대단하였다. 정조는 변경붕을 불러 제주의 상황을 전해 듣고, 진휼책을 마련토록 하였다. 이후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재임하던 정조22년(1798) 변경붕은 당시 제주 정의현에 유배 중이던 윤범중(尹範中)과 내통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대정현으로 방축(放逐)되었다.

정조24년(1800) 죄가 탕척(蕩滌)되어 사면되고 순조4년(1804)에 복직되었다. 이후 성균관 전적 및 대정현감을 거쳐 순조16년(1816) 사헌부 장령에 임명된다. 순조18년(1818) 만경현령에 제수되고, 순조20년(1820) 환곡상의 행정 처리 문제로 다시 파직된다. 이후 제주로 낙향하여 순조24년(1824) 향년 68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변경붕은 문장이 뛰어나고 복술(卜術)에 능통하였으며, 목민관으로서 지방을 잘 다스렸다. 만경현령 재임시 한발대책으로 대용작물의 재배를 권장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함으로써 공덕비가 세워졌다. 또 순조11년(1811) 2월부터 1813년 8월까지 대정현감에 재직하면서 지역 내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등 정사를 잘 보살폈다.

학문과 저술 : 변경붕의 문집으로 『통정대부 사헌부 장령 변경붕 문집(通政大夫司憲府掌令邊景鵬 文集)』이 문중에 전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에서 이를 발굴, 번역 작업을 실시하여, 2010년 그 면모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변경붕 문집은 250장 500여 면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그 중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문집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성리학적인 내용과 제주도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제주의 역사를 기록한 「탐라사적(耽羅事蹟)」이 눈에 띤다.

변경붕 문집은 당시 과거 합격자가 많지 않았던 제주 지역의 문인이 저술했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집필자 이규복) 대정향교 명륜당(明倫堂) 편액은 순조11년(1811) 당시 대정현감이었던 변경붕이 주자의 글씨를 본떠 쓴 것이다.

변경붕의 묘는 신도3리 838번지에 부모 묘의 오른쪽 앞에 있다. 주변은 모두 경작지이다. 묘의 방향은 북쪽(0°)에서 동쪽으로 100°정도로 동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봉분이 직경 530㎝, 길이는 770㎝에 이르러 꽤 큰 편이다. 부모의 묘와 변경붕의 묘 사이에는 큼직한 바위가 돌출되어 있다. 앞 쪽 산담에 붙여 키 60㎝ 정도의 동자석과 묵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부모의 묘와 함께 널찍한 산담으로 에워싸여 있다.
《작성 16121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