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기행]한센병 치료..도두2동 구질막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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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기행]한센병 치료..도두2동 구질막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1.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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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치료법 등으로 가망이 없던 나환자들 낫게 해..'

 

도두2동 구질막 터

구질막 터
위치 ; 제주시 도두동 몰래물마을 바닷가

 

 

나병치료집단수용시설인 구질막이 '몰래물'에 있었다.

도두동 하수종말처리장 바다쪽 샘물 근방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방 한약과 원시적 민간요법 그리고 미신적인 방법으로 병을 치료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45년에 제주도의 제도권 의료기관으로 이미 한센병을 치료하는 공익 시설인 구질막(救疾幕, 治病所)이 있었다.


『탐라지(耽羅志)』를 살펴보면, 제주목(濟州牧)에는 대문 동쪽 좌위랑에 심약방(審藥房)이 있었으며,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파견된 종9품 외관직인 심약(審藥)이 지방 관아의 의료와 그 지역에 할당된 약재 수급을 책임졌다고 한다.

의생 14인과 약한(藥漢) 20명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약포(藥圃)는 홍화각 북동쪽에 있었다.

나병은 일찍이 한의학에서는 가라(痂癩) ·풍병(風病) ·대풍라(大風癩)라 하였고,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 하였다. 제주도에서는 그 환자를 '용다리'라 하였다.

현대의 학술적 분야에서는 나병으로 하되 사회적 분야에서는 한센병이라고 통칭한다.


고려 문종 때인 1058∼1059년 문헌에 의하면 의사들은 나병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1443년(세종 15) 간행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처음 대풍라의 기록이 보이고, 《조선왕조실록》에도 1412∼1622년경의 약 200년간에 걸쳐 나병이 유행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구라사업(救癩事業)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 10년(1428) 8월 30일


형조에서 아뢰기를 "제주인 사노(私奴) 일동(一同, 사람 이름)은 그의 처 니을망(泥乙望)과 함께 전남편의 아들 정신도(鄭伸道)를 목매어 죽였습니다.

또 니을망에게는 나병에 걸린 10세 난 딸이 있었습니다. 관에서 나환자를 해변으로 옮긴다는 말을 듣고 그 딸을 해안으로 끌고 가서 떠밀었습니다.

그 딸이 손을 잡고 슬피 울어도 억지로 밀어서 언덕에서 떨어져 죽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율(律)에 의하여 니을망은 장(杖) 60, 도(徒) 1년을 속하게 하고, 일동(一同)은 참에 처하십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75쪽)

 

세종 27년(1445) 11월 6일


제주안무사가 아뢰기를 "본주 및 정의·대정에 나병(癩病)이 유행합니다.

만약 병에 걸린 자가 있으면 그 전염되는 것을 우려하여 해변의 사람이 없는 곳에 두므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암애(巖崖)에서 떨어져 그 목숨을 끊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신이 승인(僧人)으로 하여금 뼈를 거두어 묻게 하고, 삼읍(三邑 ; 濟州牧·大靜縣·旌義縣)에 각각 치병소( 治病所)를 설치하여 병인(病人)들을 모아서 의복·양식·약물을 공급했습니다.

또 목욕할 그릇을 설치하여 의생(醫生)과 승(僧)으로 하여금 치료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현재 나병(癩病)환자 69인 중에 45인은 차도가 있고 10인은 아직 낫지 않았으며 14인은 죽었습니다.

다만 삼읍에 승(僧)은 본래 군역(軍役)이 있는데, 청컨대 삼읍의 승 가운데 각 1인을 그 역에서 면제하여 항상 의생(醫生)과 같이 구료(救療)에만 전념하게 하십시오.

의생도 역시 녹용(錄用, 임용)을 허락하여 권장하십시오." 하니 병조(兵曹)에 내렸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137∼138쪽)(※여기서 말한 제주안무사는 奇虔임)

 

문종 원년(1451) 4월 2일


기건(奇虔)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기건은 이사(吏事, 문관이 하는 일)를 조금 익히고 제사(諸史)를 즐겨 보았다. 일찍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전복(全鰒)을 먹지 않았다.

또 제주가 해중(海中)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병(癩病)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처자라 할지라도 또한 서로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이 없는 땅으로 옮겨두고 스스로 죽기를 기다렸다.

기건(奇虔)이 관내를 순행(巡行)하다가 해변에 이르렀을 때 암벽 밑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가서 보니 과연 나환자(癩患者)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까닭을 물어서 알고는 곧 구질막(救疾幕)을 꾸미고 나환자 100여명을 모아 수용하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고삼원(苦蔘元)을 복용시키고 해수(海水)로써 목욕을 하게 하니 태반이 치료되었다. 그가 체임하여 돌아올 때는 병이 치료된 자들이 서로 울면서 보내었다.(조선왕조실록중 탐라록 147쪽)

 

김순택(피부과 전문의)의 연구에 따르면 기건의 구라사업(救癩事業)은

①삼읍에 나환자를 위한 전문 입원 시설을 마련함

②군역을 면제한 승려를 파견, 구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함

③나환자들에게 식량을 지급함

④약물 복용과 해수치료법 등으로 가망이 없던 나환자들을 낫게 함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나병을 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가보건의료사업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국가적 나관리 업무의 최초 기관이자 제주도 첫 의료기관이라고 할 것이다.(한라일보 1997년 3월 24일)

그러면 구질막(救疾幕)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사수동(본동) 해변 '진빌레'와 홀캐 포구사이에 길게 북쪽으로 뻗어나간 높은 암석을 고랭이동산 또는 병막(病幕)이모르라고 한다.

암석 밑 동쪽은 사수천 하구이고 서쪽은 고랭이원인데 이 소(沼)를 구실물, 구시물, 용다리샘이라 한다. 담 너머 밭을 구실밭, 이 밭 남쪽 길을 벵모르질 또는 구른질이라 하였다.

또 이 남쪽 삼거리를 중시린(릴)목이라 하며 진빌레에는 고승물이 있다.


구실물, 구시물, 용다리물 - 나환자들이 몸을 씻는 구질(救疾)에서 온 말


구실밭 - 나환자들을 수용하여 병을 치료하는 구질막 터, 요즘의 병원에 해당함


벵모르질, 구른질 - 나환자들이 이용했던 길


중시린(릴)목 - 의생과 중이 묵었던 곳


고승물 - 나환자들과는 달리 의생과 중이 사용했던 물


흘캐(홀캐, 泥乙浦, 泥浦, 泥乙浦村) - 사수동의 옛이름


니을망(泥乙望) - '泥'는 '흙, 홀, 즌흙, 즌흙 니'이며 '乙'은 어미 'ㄹ'을 이어간 것이니 제주 방언 '할망'을 훈독자로 결합 표기한 것.

제주도에서는 남편이 제 아내를 부를 때 젊거나 늙거나 '할망'이라 부르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니을망'은 할망으로 읽는 것이고 흘캐 동네에 살았던 할망이었을 것이다.

구질막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김순택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는데 김순택은 처음 '물동산'에 구질막 터 표석을 세웠다가, 마을 사람들과 협의 후 현재의 장소(신사수와 흘浦 구사수의 경계)로 옮겼다. (몰래물 향토지 152∼156쪽)

그러나, 기건 목사가 설치한 구질막의 정확한 위치는 몰래물 마을 방사탑 북쪽에 있는 '沙水泉' 주변인 것 같다.

제주시문화유적표석세우기추진위원회와 몰래물애향회 사이에 구질막(救疾幕) 표석 세우는 자리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지금의 위치로 합의하여 세웠다 함

구질막은 돌담을 쌓고 지붕을 덮는 정도의 움막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약 달이는 시설이 있었고 남녀별로 구분하여 수용하고 식량을 공급하였다고 한다.

약은 '고삼'이라는 풀의 뿌리를 달인 〈고삼원(苦蔘源)〉을 이용했다. (2003년 10월 8일 김순택 세종의원장과 통화)

고삼은 '너삼'이라고도 하며 향명(식물분류학적 표준말)으로는 '도둑놈의지팡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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